[김영애의 안심뜰] ‘내 잣대’ 아닌 ‘생명’으로 만납시다

8. 교만함 내려놓으려면 일처리 능률로 생긴 상사와 갈등 결국엔 내 판단이 더 적합했지만 상대방 어떻게 대했는지가 중요

2024-04-05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온라인 줌을 통해 도반들을 만났다. 코로나19 시기 시작된 온라인 윤독법회가 어느덧 4년째를 맞고 있다. 1부 30분간은 108배를 모시고, 2부 30분간은 한탑 스님의 〈금강경법문〉 책자를 함께 윤독하며 법담을 나눈다. SNS에서 다양한 인연을 맺고, 그분들의 고민을 들어드리면서 부처님의 지혜법문을 공유해야겠다는 원력이 더욱 다져졌다. 종교가 없거나 막연하게 불교에 호의를 가진 분들과 108배를 통해 공부의 연을 맺고, 자연스럽게 금강경 공부로 인례를 했다.

어느 날 〈금강경법문〉 공부를 마친 후에 진서님(가명)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희 회사는 전기공사를 하는 회사예요. 회사소속 내부 직원들과 외주업체에서 온 분들이 함께 일을 하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저의 상사께서 외주업체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방식이 원칙에 안 맞다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문제제기를 했는데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만 듣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여러 번 다툼이 있었어요.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일처리가 능률적이지 못하다고 상부에 문제제기를 한 결과,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어요. 거기에 감정이 상한 상사는 제게 곱지 않은 말투와 시선을 보내고 있어서 한 공간에서 일하기가 많이 불편하고 아침마다 출근하는 제 마음도 무거워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데 나의 습관과 같기를 원하는 데서 늘 시비가 발생한다. 나의 기준과 익숙함으로 사람을 대하니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하는 것들은 행복하게 살자는 취지에서 만든 하나의 기준에 불과하고, 기준이 지켜지지 않아도 생명은 여전히 존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행동을 나무라는 것을 넘어 사람을 무시할 때가 있다. 생명이 먼저가 아니라 규범이 먼저인 것이다.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는 밑변에는 ‘난 적어도 당신과 같은 행동은 안 한다’ ‘난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올바른 인간이다’ ‘내가 맞고 당신은 틀렸다’는 교만심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의 사람을 만나거든 ‘혹시 내 잣대가 먼저인가?’를 떠올려보자. 나는 틀리다고 지적하는 저쪽의 행동이 정작 그 당사자에게는 아주 옳은 행동일 수 있다. 그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어디서 누굴 만나든 나의 평가 기준이나 잣대로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 만나야 진정한 만남이 이뤄지고, 그 사람의 마음도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원칙에 맞지 않는 행동이지만, 그것이 때로는 누군가의 꺼져가는 목숨을 살리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따져 묻지 않고 기꺼이 눈감아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이면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커다란 생명의 흐름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내 의견만을 주장하는 교만함은 내려놓아야겠습니다. 나와 상대를 둘로 보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마음은 항복받아야 한다고 금강경에서 강조하시죠. 누군가를 지적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순간의 내 마음을 살피는 일이에요. 아무리 교양 있는 말투로 가린다 한 들 내가 옳다는 생각이 밑변에 있으면, 그 마음을 눈빛과 몸짓으로 전달받은 상대방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기 어려우니까요. 진정한 개선과 수정은 상대에 대한 인정과 긍정 속에서 이뤄진다고 믿어요. 상대방을 진심으로 부처님으로 대하고 공경하는 자세가 중요하죠.”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한탑 스님께서는 〈금강경법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약 마땅치 않은 현실을 자꾸 만나고 있다면, 내가 먼저 마땅치 않은 생각을 가진 결과로서 그런 현상이 내 앞에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럼 마땅치 않은 현실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 마음속의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내 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상 세계가 바뀔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허망한 생각을 모두 다 내버리고, 본래 그것밖에 없는 절대생명, 부처님생명만을 인정합니다. 우리 눈에는 나와 남 사이에 확고부동한 울타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부처님의 눈에는 모두가 무한절대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는 대립이나 생존경쟁에서 비롯된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왜 부처님생명을 못 보는 걸까요? 무명 때문입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생명을 살고 있는 참생명 자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진실 자체를 깨달으신 분으로 지혜가 밝은 광명 자체입니다. 제가 보고 있던 것을 부정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마음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