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탐사대] 태조산 ‘뷰 맛집’…현몽 이야기도 한가득

7. 천안 각원사 일본 유학 중 각연거사 인연 대불 조성할 불사금 책임져 대원 스님 모든 불사 도맡아 카페 수익금 ‘이웃돕기’ 회향

2024-03-29     목경찬/불교학자
벚꽃이 만개한 태조산 각원사 전경. 1977년 조성한 청동대불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충남 천안 태조산 각원사는 꽃구경을 오는 사람들로 주말은 물론 평일도 늘 붐빈다. 4월 초부터는 화려하게 핀 벚꽃을 시작으로 영산홍 등 각양각색 꽃들이 넓은 사찰 경내를 장엄한다.

각원사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지만, 전국에서 오는 순례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1977년 청동대불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창건 초창기부터 전국에서 많은 순례객이 다녀갔다. 천안톨게이트에서 10분 거리 정도로 접근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국내 최대 청동대불을 모신 기도처로서 유명하기 때문이리라. 각원사 청동대불로 천안이 널리 알려져 천안대불이라고도 한다.

창건 당시 심은 벚꽃부터 이후 수시로 심은 꽃들이 화려하게 장엄한 사찰 모습은 온라인으로 퍼져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각원사로 옮기게 한다. 소위 ‘뷰(view) 맛집’이다. 각원사는 천안 8경 가운데 하나다.

남북통일 원력이 大佛 조성으로
각원사 창건은 법인 스님(1931~)의 원력으로 시작되었다. 1946년에 해인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0년 11월 어느 날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참배하였다. 세상이 전쟁으로 북새통이 된 상황에서 스님은 불국토를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리고 신라 김대성이 통일된 국가의 번영을 바라며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웠다는 생각에 이르러 제2의 김대성이 되고자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석굴암 부처님 앞에서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도량 건립을 서원하였다.

스님의 원력은 동경 유학 중에 만난 재일동포 각연거사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1969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길에 오른 스님은 학업과 수행을 겸하여 정진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1974년 6월 21일 지인이 한 중년 부부를 소개하였다. 바로 각원사 창건의 인연이 된 각연 김영조 사장 부부였다.

각연거사는 지병으로 2~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 소견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스님의 기도에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었다. 스님은 거사에게 말하였다. “무엇보다 2~3년밖에 살 수 없다는 생각을 10년 이상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십시오. 자연의 법칙은 누구도 어길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100일 동안 기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100일 기도 후 거사는 불심과 건강이 매우 좋아졌다. 이후 거사는 동경 명월사 창건의 큰 시주자가 되었다. 어느 날 각연거사는 현몽하고 스님에게 말하였다. “스님이 종종 말씀하시던 크나큰 부처님이 드넓은 광야에서 솟아오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더러 대불(大佛)을 조성하라는 현몽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님께서 땅을 사서 절을 지어내실 자신이 있으시다면 저는 대불을 조성할 자금을 마련하겠습니다.”

1975년 6월 12일 귀국한 스님은 절터를 물색하였다. 11월 29일 중부권 이남에 절터를 찾던 중 지인으로부터 좋은 땅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어느 유명 정치인이 은퇴한 후 유원지를 개발하려고 길까지 어느 정도 닦아 놓고는 개인 사정으로 매물로 나온 산이란다. 바로 지금의 태조산, 각원사 자리였다.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던 땅이었으리라.

각원사 청동대불 아미타부처님.

왼손·오른손 자세 바뀐 이유
각연거사의 시주금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의 정성 어린 성금이 모였다. 그러한 정성이 모여 1977년 5월 9일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청동대불인 아미타부처님을 태조산 중봉에 봉안하였다. 높이 15m, 둘레 30m, 귀 길이 1.75m, 손톱 길이 0.3m, 무게 청동 60t의 청동좌불이다.

청동대불을 친견하는 길은 둘이다. 무량공덕계단을 오른 뒤 아미타부처님 정면을 바라보며 친견하는 길, 대웅보전에서 칠성전을 거쳐 아미타부처님 뒷모습을 먼저 보고 앞으로 나아가 친견하는 길이다. 대부분 후자의 길을 택한다. 후자의 길로 청동대불을 돌아본 어느 보살이 말하였다.

“교수님, 각원사 부처님은 엉덩이가 제일 멋있어요.”

어느 비평가도 그렇게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박수를 보냈다. 후자의 길을 택하면 당연히 부처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보살에게는 부처님의 엉덩이가 멋있어 보였다.

전자의 길, 무량공덕계단으로 가는 길은 조금 힘들다. 무려 203계단이다. 108번뇌를 없앤다는 뜻을 담은 108계단, 아미타부처님의 48원을 상징하는 48계단, 관세음보살 32응신을 뜻하는 32계단, 12인연법을 상징하는 12계단, 불법승 삼보를 의미하는 3계단으로 도합 203계단이다. 무량공덕계단을 오르면, 연꽃 모양의 크고 작은 77개의 봉우리 안에 계신 아미타부처님이 평온한 미소로 맞이해 주신다.

아미타부처님은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올리고 계신다. 이 손 위치에도 이야기가 있다. 조성 당시 조감도나 모형 사진을 보면 왼손이 올라가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불모(佛母. 부처님을 조성하는 이)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왼팔이 아프니 오른손을 들게 해다오.” 현몽대로 불모는 부처님의 자세를 바꿔 지금처럼 모시게 되었다. 필자는 가끔 이렇게 바꿔 설명한다. “왼쪽에 오십견이 왔으니 오른손을 들게 해다오.” 그런데 왜 부처님께서 왼팔이 아프다고 하셨을까?

각원사 전경.

산신의 허가 받아 불사하다
청동대불 뒤쪽으로는 산길이 있다. 그렇게 가파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만하지도 않은 산길을 20여 분 올라가면 태조산 능선에 이른다. 초입 바위에 새겨진 관세음보살을 만난다. 각원사 불사 과정 중에 모셨다. 전문가도 오래된 불상으로 오해할 정도다.

법인 스님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법인 스님의 상좌 대원 스님(1943~)이 각원사의 모든 불사를 도맡아 책임졌다. 어느 날 스님은 태조산 포행에 나섰다. 태조산 능선에 이르자 큰 바위가 보였다. 문득 그곳에 관세음보살을 모시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석공 일행과 함께 바위에 작업대를 설치하고 하산하였다. 그런데 작업하기로 한 날 석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석공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스님, 지난밤에 호랑이에게 옆구리를 물리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허리가 아파 거동조차 힘듭니다. 이제 겨우 연락드립니다. 관세음보살을 조성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 순간 스님은 ‘아차’ 하였다. 꿈에 나타난 호랑이는 바로 산신이다. 산신에게 제대로 고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니, 산신이 제동을 건 것이다. 절 집안 이야기가 있다. ‘혹 불사할 때 잘못하면 산신이 기분 나빠한다. 그래서 절을 지을 때, 산신각을 높은 곳에 먼저 짓고 이후 다른 법당을 짓는다. 이후 진행되는 불사도 산신이 먼저 결재해야 불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스님은 산신재를 지내고 불사를 고하였다. 곧 석공은 건강한 몸으로 불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태조산 능선 관세음보살상 앞에 서면, 저 멀리 ‘하늘 아래 편안한 동네’ 천안(天安)이 펼쳐진다. 여력이 되면 그곳까지 가보자. 물론 각원사 경내를 돌아보고 청동대불이 계신 주위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좋다.

청동대불 옆에는 야외 카페 무량수가 있다. 카페가 생긴 것도 관세음보살의 가피다. 어느 보살이 대웅보전에서 기도를 드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불단에 계신 관세음보살이 다가와 당신의 옷을 벗어 입혀주셨다. 그 가피를 받은 보살은 이후 평온한 삶이 이어졌다. 법명도 관세음보살과 관계 깊은 보덕심이다. 사찰 봉사를 하던 보덕심 보살은 이 좋은 도량을 찾아온 사람이 잠시 차 한 잔할 공간도 없다는 것에 마음 쓰였다. 야외 카페를 만들면 어떨까? 보살의 생각으로 그렇게 무량수 카페가 생겼다. 무량수 카페의 수익금은 백혈병 및 소아암 어린이 환우 치료비 후원금, 장학금 등에 쓰인다. 카페 봉사자들 역시 미소를 머금고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 벚꽃이 화려한 날 각원사 무량수 카페에서 차 한 잔하는 여유가 모든 이들에게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