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휴 스님의 능가경 강설] 46. 속지 않는 일만 있다

46.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2023-12-08     지휴 스님((사)여시아문 선원장)

깨달음이 없듯 가르침도 없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 듣고 이해한 오온의 미사여구들이지, 가르침에는 어떤 사실적인 것을 적시하기 위해 언어도 개념도 사용할 수가 없다. 만약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를 배워서 언어로서 깨달음을 표현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헛발질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된다. 스스로가 표현하는 것은 깨달음을 표현하고자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아 엉키게 되고, 출발점이 뒤죽박죽이게 된다. 출발점이 한결같지 않으면 언제나 맞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사대오온이 말하는 한결같은 것과 스스로가 말하는 한결같은 것에는 교집합이 없다.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문제다. 스스로가 말하는 한결같다는 것은 개념으로 세울 수도 없고, 모양으로 만들 수도 없어서 출발점에서 세워야 하는 대상이 없다. 오온은 대상으로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리고 오온은 출발하는 행위의 맹점을 놓치면서 대상으로서 출발해버린다. 출발하는 행위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되돌아보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먼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알지 못하는 것들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본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어디에도 그 자신이 모르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면서 걷기만 한다.

출발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표시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루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출발을 미루어야 한다. 출발선에 있다면, 발을 떼려는 그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아야 한다. 섣부르게 출발 하면 큰 병에 걸린 사람이 되어버린다. 짧은 기간은 괜찮겠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병은 아주 깊어진다. 물론 당사자는 병이 깊어진 줄도 모른다. 보이는 몸이야 더 많이 알아가고 이해되니 차차 밝아질 것이라 굳게 믿는 마음 때문에 병은 절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이 많아지면, 아주 큰 병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수술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전체를 수술해야 한다. 수술하는 사람도 힘들지만, 수술 받는 사람은 더더욱 힘들다. 따라서출발하려는 행위가 가진 진실을 밝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리다. 여기에 모든 힘을 집중하여야 한다. 세상에서 바보가 되어도 좋다. 출발하려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움직였다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앞뒤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가르침이 있다. 물질은 내가 될 수 없고, 느낌, 지각, 의도, 의식도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양변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쉬워진다. 양변은 어느 쪽도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 어쩔 수 없는 추측들이 출발하게 한 것이지, 옳고 그름이 있어 출발한 것이 아니다. 찾는 답은 없다. 그러므로 물음이 있을 수 없다. 움직임 없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밝아져야 한다. 우리가 속는 것은 움직여서 속은 것이지, 속는 것이 있어 속은 것이 아니다. 움직임 없는 자리를 직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일단 속는 일은 없다. 속는 일이 없으면 잘 되는 것도 없고, 잘되지 않는 것도 없다. 오온은 판단을 유도하여 어떻게든 속이게 한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움직이게 만든다. 그 짧은 움직임에서 양쪽을 간파하여야 한다. 긴 시간을 두고 승부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짧아 인식하기도 어렵다. 찰나를 놓치면 승부는 나도 모르게 끝난다. 승부가 끝나고 나면 항상 뒷북을 친다. 승자는 웃겠지만 패자는 씁쓸한 맛을 느낀다. 이런 모든 일들이 오온이 노리는 꼼수다. 수행은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속지 않는 일만 있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여야 한다. 스스로는 하는 일이 없다. 오온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려고 모든 노력을 하는 것이지, 스스로가 오온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온이 시비를 거는 일이지, 스스로가 시비를 거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는 오온을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기고 지는 데는 관심도 없다. 오온이 성숙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앎은 어떤 선택이 아니다. 의식이 만들어 놓은 ‘나’라는 허상은 실재를 선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