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스님의 제주산방일기] 탐라에서 제주로 

2023-12-02     인현 스님 제주 선래왓 주지

한반도에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초원을 달리던 몽골의 군사들이 침략하면서 천년을 지켜온 황룡사 9층 목탑 등의 수많은 문화유산은 물론, 20년에 걸쳐 만든 초조대장경마저 잿더미가 됐다. 이에 맞서 고려 조정은 온 나라의 힘을 모아 또다시 팔만대장경 제작에 나섰다. 이처럼 전란에 휩싸인 한반도의 격변하는 시대 상황은 탐라국으로까지 밀려왔다. 

탐라국은 고려 숙종 1105년에 군사·경제적 이유로 한반도의 역사 속으로 편입됐다. 이때부터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인 탐라군(현)으로 바뀌면서 독립적 지위는 막을 내린다. 이어 고종은 집권 초기에 탐라군을 ‘제주군’이라고 고쳐 부르고 부사 및 판관을 두어 행정을 관장했다. 

하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정벌 이후 이 땅은 원의 직할지가 되면서 ‘제주’라는 지명 대신에 ‘탐라’라는 국명을 다시 사용했다. 원나라가 탐라국 명칭을 사용하며, 탐라국(耽羅國)초토사, 탐라국안무사, 탐라군민총관부, 탐라만호부 등을 설치해 통치에 나선 의도는 자명하다. 

이후 제주는 고려에 의해 1295년에 이르러 주읍으로 승격되고 중앙에서 목사가 파견됐다. 1374년에는 최영 장군 일행이 목호의 난을 평정하면서 탐라에 대한 원의 지배는 막을 내린다. 조선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오랫동안 전래하던 성주·왕자의 칭호가 폐지됐다. 성주는 좌도지관, 왕자는 우도지관으로 개칭됨으로써 종전의 토관직이 없어지고 제주 토착 지배층도 없어지게 됐다. 이후 태종 16년에는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은 제주목이라 해 목사가 파견되고, 산남은 동서로 양분해 동쪽이 정의현, 서쪽이 대정현으로 구분돼 현감이 다스렸다. 이로써 탐라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제주라는 이름으로 정착돼 불리게 됐다.

조선 유림의 영수 점필재 김종직은 ‘탁라가’에서 탐라의 원형을 “처음 나라 세운 신인들은 해 뜨는 곳에서 온 이들과 짝지어 살았으니 오랜 세월 세 성씨 혼인으로 전해오는 풍속이 주진촌과 같다네. 성주의 작호는 이미 없어지고 왕손도 끊겨 신인의 사당은 황량해도 해마다 원로들 옛 조상을 추모하고”라고 기록했다. 화목하게 살아가던 주진촌과 같다던 탐라는 그 국호를 잃고 중앙에 복속되면서 수탈의 땅으로 전락했다. 

<원각경> 발문을 쓴 제주판관 김구는, 제주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 다툼이 많았는데,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선정을 베푼 이들은 매우 드물고 수탈의 역사는 길었다. 더욱이 원제국 시기에는 고려와 원나라의 가혹한 이중의 수탈로 제주에서 민란이 여러 차례 발생했고, 그 수탈의 역사는 조선조로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탐라국의 지위를 잃고 고려에 편입되면서 겪게 된 변방의 고초는 4.3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해 제주는 지구의 어느 곳보다 아픔을 가슴에 묻었기에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섬이 됐다. 지금 제주는 역사의 화마에서 벗어나 있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