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남 장편소설 아디카야의 검] 42. “칼을 찾아라…그럼 알게 될 것이다”

42. 보석을 찾는 이 1

2023-11-20     백금남

-아마 우리는 전생에도 부부였을 거예요. 일주 씨가 그리는 그림 속에 저를 넣어 주세요.

-그렇구나. 너를 그리기 위해 내가 이 길로 들어섰구나.

-내생에 우리는 우리가 그린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그래. 우리들의 사랑이 영원하다면….

대학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녀마저도 그림쟁이에게는 시집보낼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내 품에서 날아가 버렸다. 그림을 그리면 그녀의 얼굴이 그림 속에 떠올랐다. 그것을 칼로 찢었다. 찢고 또 찢었다. 그러나 그녀의 잔영은 지울 길이 없었다. 절로 절로 떠돌았다. 그리고 내 화폭 속에 떠오르는 그녀가 곧 부처라는 것을 알았다. 자연히 본격적으로 금어 공부하기 시작됐다. 당대의 금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러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와 한방에서 생활하며 우리는 그림을 그려 나갔다. 새벽이면 아버지가 들어와 밤새운 작업을 발길로 내질렀다.

-부처는 계집이다. 너의 마음을 잡고 흔드는 것. 그래서 죽여야 한다.

부처를 그리면서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살아난다니. 어떻게 부처를 죽이고 부처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산을 내려가기 전날 밤 나는 보았다. 시퍼런 삭도를 들고 공양각으로 소리 없이 들어서는 그를.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고 보라지. 당신과 나의 그림이 뭐가 다른가.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그림 앞에서 칼을 들고 몸을 떨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점차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가 칼을 들고 석상처럼 굳으면 굳어갈수록 나는 부르짖었다. 찢어요! 찢어요! 그러나 그는 돌아서고 있었다. 찢으면 만용의 함정에 빠지고, 찢을 수 없다면 아직도 무지하다는 지독한 양면도법을 결국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뒤를 말없이 따라 산문을 나섰을 때 보았다. 아버지가 산모퉁이에서 서 있는 모습을.

오늘도 아버지가 평생을 그려 오던 그림 앞으로 나아가 본다. 아버지의 그림은 내가 넘보기에 너무나 엄청난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이루어 놓은 그림들. 그도 인간이고 보면 그림을 이루면서 이만한 사유, 이만한 번뇌, 이만한 고뇌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그림이 본질 그 자체일까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세인들이 하는 예술이라는 작업이 인공의 자연미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창조 과정에 있어 지성이나 사고, 사리, 논리, 탐미적인 어떤 인공성의 미업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했다. 무위자연의 상태. 그렇지 않고는 신앙의 대상물이 될 수가 없기에 궁극적인 목표는 오로지 하나, 지성에 의한 분별 작용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의 자동 현상 그 자체를 얻고자 했다. 그것이 절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절대를 얻으려면 절대를 쳐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절대를 쳐버린 절대. 분명히 그것은 순수 위에 있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에 나는 불안하다. 내 그림이 가지는 불완전성 때문에 나는 불안하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림으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아아, 저 저잣거리의 실상에 비한다면 내가 그려내는 그림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렇다. 그림이나 그리던 저잣거리는 나에게 있어 천국은 아니었다. 세상은 그대로 지옥이었고 그 지옥 속을 헤매면서 만행과 고행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부처의 얼굴 하나 제대로 그릴 수 없으면서 걸식하기가 무서웠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 없이 그들의 주머니를 털 수는 없었다. 그들의 시주물로 배를 불릴 수는 없었다. 나는 배고픈 이들을 위해 불화를 내다 팔았다. 부처는 확실히 구원자였다. 사원의 종(鐘)이 값나가면 그것이라도 떼다 팔았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먼 나의 개안은 잠들어 있던 또 하나의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나는 저잣거리를 헤매면서 점차 내 속으로 들어와 내가 되어 버린 종을 치기 시작했다. 노동일을 해서 쌀을 사 오갈 데 없는 노인들에게 밥을 해 먹였다. 나환자촌에 들어가 그들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가 부처의 얼굴을 그리는 사이 나는 구원자적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이었다. 구원자적 삶을 살기 위해 그림을 버린다는 사실. 그림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한다고 해서 순일무잡한 절대의 경지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회의가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나의 구원자적 삶은 과연 진실한가? 허위와 거짓의 맥박을 찢어 나가던 아버지. 그렇게 나는 진실하게 구원자적 삶을 통해서 절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림 수행과 현실적 수행. 내가 다시 그림에 미쳐버린다면 저기 저 고통 받고 신음하는 중생들은 누가 돌볼 것인가. 그림을 그려 부처를 보겠다면 나는 여기 있어야 한다. 저기 그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나는 여기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가야 할 것인가? 여기 있어야 할 것인가? 나의 업장.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그림이 얼마만큼 진실할 것인가? 사고의 구술에 지나지 않는 그림. 그림을 통해 정말 절대를 볼 수 있다고? 허위와 위선과 위악에 찬 사유. 그 사유를 통해 절대를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든 볼 수 없든 문제는 나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림을 그린다면 중생의 시주 밥이나 걷어 먹으며 거짓말을 일삼아야 한다. 그런데도 되지도 않은 사고의 구술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척박한 세상에서 공양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 소중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림, 그림을 그리고 싶다. 공양적 삶이 성취되지 않는 한 내가 그리고 있었던 삶은 허위요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림,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아 쉽지 않다. 두 세계를 모두 안을 수는 없는 것이냐? 배고픈 사람들에게 공양하면서 이게 그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문제는 내가 구원자적 진실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구원자적 삶이 이상이라면 결코 그들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절대평등이다. 구원도 없고 이상도 없는 그 경지에 가 있지 않고는 나의 구원은 거짓이라는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아버지의 스승은 철저한 이원론자였다. 터무니없었다. 세상에! 영혼이 어디 있고 윤회가 어디 있는가. 귀신이 어디 있고 혼령이 어디 있고 육도가 어디 있는가. 그토록 수행을 오래 하고 그림을 그렸다는데 그는 그런 것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부처님도 윤회를 설파하면서도 그것이 방편설교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연기설의 무아. 무아가 무엇인가. 내가 없다는 사상이다. 내가 없다면 영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 윤회가 어디 있는가. 내가 없는데 윤회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지금도 꿈속에서 아버지는 내게 소리친다. ‘아디카야의 칼을 찾아라. 그럼 부처의 대답이 옳은지 나의 대답이 옳은지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칼이 대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삽화=김상규

 

그럴까?

그의 글은 여기서 끊어져 있었다.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자기 감상이 강한 글이었다. 나는 오오스마 기자에게 글을 넘기고 막연한 심정으로 방을 나왔다.

정원으로 나서자 밤바람이 찼다. 이상스러운 비애가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괴어올랐다. 저 글이 이석원의 글이 틀림없다면 현실적 삶을 지향하며 한 자 한 자 글을 쓰고 있었을 젊은 사내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드높은 순수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절망했을 사내. 어떻게 저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우리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디카야의 눈물1

-일어나십시오!

누군가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아마도 그의 글에서 온 감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심 작가였다. 눈을 뜨자 허겁지겁 원주스님 쪽으로 달려가는 오오스마 기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원주스님이 오오스마 기자를 향해 웃었다. 오오스마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럼 스님 가보겠습니다.

-왜 이렇게 아침부터 서두르시오?

원주스님이 오오스마 기자에게 물었다.

-방금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곳으로 한 번 가보려고요.

오오스마 기자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먼 길 오셨는데 공양이라도 하고 갈 일이지.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좋은 소식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상심이랄 거야 뭐 있겠소. 명과 인연이 그만하니 그렇게 가는 것을….

-죄송합니다.

-아니요. 어서 가 보시오.

-그런데 스님이 말씀하신 갈루촌이 여기서 먼가요?

-이 길로 곧장 내려가시오. 멜레오드간지 쪽으로 가다 보면 갈루촌이라는 데가 나올 것이오.

-고맙습니다.

-그럼 잘 가시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되는 대로 연락을 주시오.

앞서 쌩하게 나가는 오오스마 기자를 보다 말고 나는 뒤늦게 원주스님께 인사를 했다.

네 사람은 부지런히 걸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오오스마 기자에게 물었다.

오오스마 기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제 그 글을 다 읽고 나니까 갑자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길이 눈에 익어서인지 올라올 때와는 달리 수월했다.

-그런데 원주스님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을이 가까워져서야 내가 물었다.

-일은 무슨. 아침에 원주스님에게 혹시 이석원이 산을 내려가 어딜 잘 들르는지 모르겠느냐고 다그쳤더니 한 신자의 말에 의하면 그를 갈루촌에서 보았다고 하더랍니다.

-갈루촌?

-그러니까 이석원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 말인가요?

내 물음에 오오스마 기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 가면 나환자촌이 있는데 어느 날 그곳에서 어떤 여인이 죽어가면서 자기 장기를 모두 나병 환자들에게 주고 갔다는 겁니다. 요즘은 한센병이라고 하나요?

-나환자? 그러니까 한센병 환자에게 장기기증을 했다는 말인가요?

-아마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던 모양인데 죽어가면서도 자기 장기를 그들에게 주고 갔다는 겁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 소문이 미담이 되어 흘러 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모양인데 우연히 그곳에서 어떤 신자가 그를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럼 그 한센병 환자촌에서 이석원도 봉사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어제까지는 모른다고 시침을 떼던 스님이 어떻게 마음을 연 것인지?〈계속〉

▶한줄 요약

이석원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글 속에는 이석원 자신의 고뇌와 방황이 적혀있었다. 글을 읽고 난 이 기자 일행은 이석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갈루촌 한센병 환자촌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