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휴 스님의 능가경 강설] 42. 찾는 마음, 어리석음으로 생긴 것
42.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는 앉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남악 회양 선사가 기왓장을 들고 와서는 좌선하고 있는 마조 스님 앞에서 기왓장을 갈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참구하려고 할 때, 그 알려는 마음으로 인해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이켜 보지 않고, 자신이 부처가 되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만다. 아마도 대부분은 무엇이 덫인 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걸려든다. 그리고 또 어떤 대상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틈도 없이 출발부터 하기도 한다. 수행에서 대부분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인데, 이 어려움은 수행하면서 생겨나는 어려움이 아니라 수행이 무엇인지를 몰라 일으키는 사소한 실수들이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특히 남자가 특별한 요리를 한다고 할 때 많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요리를 잘하지 못하면서 꺼내 놓는 것은 엄청 많다. 요리 하나를 하고 나면 온갖 그릇들이 밖으로 나오고 양념들도 나오고 부엌 전체가 아주 많이 어수선해진다. 그에 비해 요리된 음식은 몇 가지가 되지 않는데 설거지할 그릇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된다. 시간도 아주 많이 허비한다. 요리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어지러운 그릇을 정리하는 시간도 힘들다.
삶이나 수행에서 겪는 능숙하지 못한 일들은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니다. 모른다는 것도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니다. 그런 일을 접하는 지혜가 중요하다. 지혜는 순수함이다. 어떤 상태를 어디에도 전가하지 않아야 한다. 지혜는 그때의 인연의 들음에서 현재의 인연을 배우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연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상태이다. 인연은 누구에게도 백퍼센트 만족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렵다. 조금만 불만족스러워도 마음이 움직여버린다. 마음이 움직이고 나면 수행을 하는 마음이나 인생의 진로를 변경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때의 수행은 수행이 아니라 마음의 위안을 받으려는 행위일 뿐이다. 태어남은 개체의 태어남이 아니라 인연의 태어남이다. 그러니 실체가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인연에 간택이 없다면, 그는 따로 부처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대가 좌선을 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좌선을 하여 부처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소가 수레를 끄는데 만약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 소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
찾는 마음은 어리석음으로 생긴 행위이다. 그 행위는 어리석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바른길을 갈 수가 없다. 사대오온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으로 인해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다. 수레가 어디를 가는 줄 알겠는가. 그저 이쪽으로 저쪽으로 가자고 하니 가는 수밖에 없다. 어디가 종착점인지를 모른다. 그것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면서 부처가 되려고 하니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몸과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에 대해 자세하게 관찰하는 일이다. 누구나 관찰을 해보면, 몸과 마음은 최종적으로 우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배우는 목적도 똑같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고 있다는 말의 뜻을 알아 버리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이 말을 완전하고 깊이 있게 알지 못해 계속 참구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된다는 것은 우주에 일어나는 일에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알고 있다. 일어날 때 일어남을 알고 있고, 사라질 때 사라짐을 알고 있다. 미리 알려고 허둥대지 않고, 지나간 일에 되새김하여 붙들리지도 않는다. 오직 지금 그대로의 일어남을 알고 보고 있을 뿐, 그것을 실체라고도 허상이라고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