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문학살롱] 21. 질 들뢰즈의 ‘차이 생성’과 ‘연기론’
“부처의 나무는 그 자체가 리좀이 된다” 포스터모더니즘 철학자 질 딜뢰즈의 노마디즘 등 개념들 집약체가 ‘리좀’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 의미 뻗어난 그의 개념들 ‘인드라망’ 이뤄 ‘생성존재론’, 불교 연기법과 맞닿아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서론
인드라망의 철학자, 질 들뢰즈
21세기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미셸 푸코의 말처럼,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들뢰즈는 서구의 전통적인 경험론과 관념론을 해체하고 ‘존재의 철학’에서 ‘생성의 철학’으로 탈주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낡고 위계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정주민적인 사유가 아닌 유목적인 사유를 하라고 부축인다. 중심이 고정되지 않은 접속들의 향연, ‘공(空)’과 ‘화엄(華嚴)’의 세계로 나아가라 한다.
들뢰즈는 ‘생성/되기(devenir)’의 철학으로 이끌어가는 방편으로 노마디즘, 기관 없는 신체, 욕망하는 기계, 탈영토화, 재영토화 등 다양한 개념들을 열거했는데, 이것을 하나로 집약해 ‘리좀(rhizome)’이라 했다.
리좀은 식물학에서 대나무나 연꽃처럼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를 일컫는다. 들뢰즈가 이 단어를 철학적 용어로 사용하면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리좀은 줄기 자체가 다른 줄기의 어디든 달라붙어 접속할 수 있고, 다른 줄기 또한 접속할 수 있다. 수목형 나무는 중심 뿌리가 있고, 그 뿌리로부터 잔뿌리들이 나오는데, 리좀은 연결된 줄기들이 서로 만나고 흩어져 제3의 것,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
나무는 중심 뿌리로부터 위를 향해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계통적 질서를 유지하지만, 리좀은 중심이나 계층이 없이 수평으로 끊임없이 연결하고 도약해 불교의 인드라망을 형성한다.
인드라망은 제석천을 덮고 있는 거대한 그물이다. 그 그물은 끝없는 그물코로 연결돼 있고, 그곳에는 빛나는 구슬이 달려 있어 그 빛은 서로 비추고 서로 반사하고 있다. 세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작용해 중중무진(重重無盡)하는 화엄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들뢰즈는 ‘내재성의 사유’로서 서양의 ‘초월적 철학’에 반기를 든다. 현상 세계는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플라톤은 세계 밖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로서 이데아를 착안했다. 그리고 이 이데아는 불변의 신으로 전이돼 서양 사회의 중심 뿌리를 형성했다. 이데아나 신은 초월적인 일자(一者)로서 우리의 삶 너머에서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고, 그 창조된 주체는 세계 밖의 신을 인식해야 하고, 받들어 섬겨야 했다. 서양 철학은 모든 사유의 정초를 삶의 외부에 두었다.
하지만 들뢰즈는 존재의 근원을 삶의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창조적인 역능으로 해석한다. 창조란 중심이 되는 일자로 포섭되거나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되기’로 생성되는 것이다. 오직 접속하는 상호간의 내재적인 관계에 의해 새로운 생성이 이루어진다. 삶 자체가 창조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신에 의해 일회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서양의 창조와는 달리 조건에 따라 다른 것으로 생성된다는 불교의 연기법에 바탕을 둔 인드라망에 닿아 있다.
“부처의 나무는 그 자체가 리좀이 된다.”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한 말이다. 리좀, 그것은 고정된 뿌리(본질)가 없이 줄기 자체가 다른 것(외부) 과의 접속에 따라 발생과 변형을 일으켜 각각 뿌리 역할을 한다. 즉 리좀은 출발이나 기원, 끝이나 종말에 관한 사유가 아니라 중간에서 각각 다르게 형성되는 ‘차이의 생성’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차이를 생성하는 존재의 특성을 ‘양태(mode)’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양태는 고정되지 않고 항상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원인은 존재할 수 없고, 설령 동일한 원인이 가능하더라도 그 과정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기원이나 동일한 존재라고 여기는 대상이 반복될 때, 그것은 언제나 다르게 반복돼 생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현존을 뚫고 지나가는 과정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렇듯, 차이를 바탕으로 하는 들뢰즈의 ‘생성존재론’은 “모든 것은 연기적인 조건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용수(龍樹 150?~250?)의 사상과 흡사하다.
용수 보살은 연기법(緣起法)에 대해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라고 설법했다. 삼라만상은 독자적으로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연기에 의해 무엇인가가 생성돼 ‘있다’라는 것은 고정돼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모든 사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이다. 용수 보살의 말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이라는 것이다.
존재는 서로 다른 것과 의존적인 관계를 맺으며 인대(因待)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언어나 개념으로 인식되는 현상 세계는 연기에 의한 상대적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연기론은 ‘있다(有)’라고도 ‘없다(無)’라고도 할 수 없는 공(空)으로 포섭된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존재가 이미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연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들뢰즈의 차이의 생성과 불교의 연기론은, 존재들은 다른 대상들과 만나 끊임없이 세워지고 부서지면서 연속적인 변주를 하고 있다고 한다.
부처의 나무는 한 점으로 뿌리를 내려 정착하지 않고, 하나의 물결이 또 하나의 물결과 어우러져 강물처럼 흘러간다. 연기적인 조건에 따라 생성되는 리좀, 바로 부처의 나무이다.
인간은 붓다가 될 수 있을까?
‘-되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것이다. 확고한 것에 뿌리를 박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뿌리가 아니라 리좀으로, 그것은 연속적인 결연을 통해 이루어진다.
들뢰즈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기계(machine)’로 비유한다. 기계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부품과 접속하고 결합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물건이 만들어진다. 인간 역시 접속하는 항에 따라 기계처럼 다른 욕망이 작동된다. 입이 성대와 접속하면 말하는-기계, 음식과 접속하면 먹는-기계, 성적 리비도와 접속하면 섹스-기계가 된다. 욕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문턱을 넘는 것이 ‘-되기’이다. 들뢰즈는 인간의 욕망을 프로이트처럼 성적으로, 가족 간의 엄마-아빠-나의 오이디푸스적인 관념으로 보지 않고,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해석한다. 욕망이란 고정된 본성을 갖지 않은 자유로운 무의식으로, 이것을 ‘기관 없는 신체’라고 명명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하나의 중심, 하나의 일자로 귀속하지 않고 접속된 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뻗어나간다. 해 들뢰즈는 인간을 복수성을 지닌 ‘다양체(multiplicities)’라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인간에 관한 해석과 유사하다. 인간은 오온(五蘊)과 12처(處)와 18계(界)의 작용으로 이뤄져 있다. 오온은 색(色, 물질), 수(受 감각), 상(想, 지각), 행(行, 경향성), 의(識, 의식)의 다섯 가지 요소들의 쌓임이다. 12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근(根)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가지 경(境)으로 이뤄진다. 18계는 12처에 6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을 합한 세계를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한 요소들로 연결된 다양체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들뢰즈는 다양체로 이루어진 인간은 강밀도(intensities)의 분포에 따라 신체가 열린다고 말한다. 강밀도는 관계 속으로 흘러가는 운동이나 속도로, 동양 사상의 사물을 형성하는 기(氣)의 집중과 분산을 떠올리게 한다. 강밀도가 0일 때, 신체는 알(egg)의 상태가 된다.
들뢰즈는 이 탄드라적 알에서 생성되는 흐름을 ‘동물-되기’로 표현한다. 영토란 동물들이 사는 삶의 터전이다. 동물은 무리, 패거리, 개체군 등으로 서식이 복수성의 형태로 존재하고, 전염병 역시 유전에 의한 계통과는 상관없이 이웃으로 전염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양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접속된 다른 양태들에 의해 새로운 양태로 변용되며, 그 안에는 모든 양태들을 함축하고 있다. 의상 대사의 ‘법성계(法性界)’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一中一切 多重一)/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다.(一卽一切 多卽一)/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담겨있고(一微塵中 含十方)/일체 모든 티끌 속에도 또한 그러하다.(一切塵中 亦如是)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라는 법구는 시작과 끝을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 티끌과 시방세계는 강밀도의 연속체로서, 그것은 어떤 양태로도 변용될 수 있는 무궁한 실재적인 과정이다. 이는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서로 끊임없이 연결돼 있으며, 그대로가 바로 불성(佛性)을 드러내고 있다는 화엄사상 아닌가.
‘동물-되기’란 실제로 동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동물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감각을 변용시키는 것이다. 여성-되기, 흑인-되기는 여성이나 흑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적, 백인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 공생의 관계로 감응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요가나 권법으로 동물-되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뱀이나 사마귀, 학의 신체적 모습을 따라 사권(巳拳), 당랑권(螳螂拳), 학권(鶴券) 등으로 동물-되기를 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있다. 하물며 우리 마음이야, 이미 ‘부처-되기’에 연결돼 있는 것 아닌가.
▶송마나 수필가는
완도에서 태어나 전남여고와 이화여대 외국어교육학과(불어)를 졸업했다. 2016년 〈에세이문학〉에서 수필, 2017년 〈한국산문〉에서 평론으로 등단했다. 〈에세이문학〉 ‘인문학 살롱’에 〈신화속, 여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본지에 ‘송마나 시절인연’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수필집으로 〈하늘비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