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수의 알아차림의 파워] 10. 희망이 안내하는 길

안동에서의 새 출발, 정겨움 느껴 주변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겨 황혼기에 의식하게 된 삶의 변화 희망을 미래의 결과로 인식 말길

2023-11-06     박태수 전 제주국제명상센터 이사장

이사를 하려고 준비하다 보니 35년간 살았던 살림살이의 규모가 엄청났다. 버리고, 남 주고, 팔면서 그동안 보물인 양 모아놓은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모르긴 해도 내가 버린 책들만 1톤 트럭 하나는 될 것으로 보인다. 

제주를 떠날 때의 마음은 ‘희망이 길을 안내할 것’이라는 희망 하나였다. 그래서 선뜻 떠나기로 했지만 그 긴 세월의 흔적을 지우는 데는 물질뿐 아니라 정신 문제가 더 크게 나타났다. 명상센터 운영과 관련된 사람들, 운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분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낸 일과 사연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동시에 이러한 현실과 더불어 안동으로 갔을 때 나의 희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걱정도 앞섰다. 물론 희망은 지금까지 공부해온 상담과 명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일이다.

안동에 왔다. 제주에서 떠날 때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도 여러 가지를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위해 만나야 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도 적지 않았다. 모두가 낯설고 서툴렀다. 그래도 만나야 하고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일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안동이라는 곳, 고향이라는 곳, 이곳은 알게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아는 사람들의 아침인사인 “밥 잡싼니껴”라든가 시장에 가서 누군가 마주치면 “어르신 장에 오셨니껴”,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다가 다 먹었는지 확인하면서 “밥 남구치 마레이”라는 표현 등은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친근한 말들이다. 이런 일상에서 더욱 내 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내가 형제자매들과 만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내가 참으로 오랜 세월 아내에게서 저러한 삶을 뺏어버렸구나’ 하는 미안함이 밀려온다. 그나마 이러한 모습들이 나를 좀 편안하고 안정되게 해주었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는 코스는 초·중등학생들이 야구를 하도록 만들어진 낙동강 둔치의 야구장 둘레길이다. 30분 정도의 거리다. 걷다보니 마침 야구공 하나가 울타리를 넘어 날아왔다. 내 딴에는 이 공을 던지면 야구장 안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고 주워서 힘껏 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펜스의 3분의 2정도 위치에서 걸리고 말았다. 아하, 내 팔 힘이 여기까지로구나. 평소에도 느끼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공을 줍기 위해 오는 학생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새삼 나 자신의 체력의 부실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가기 위해 산길을 올랐다. 산길이 매우 가팔라서 거의 기다시피 올라갔다. 그런데 참으로 오랜만에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걷다보니 땅에 떨어진 알밤을 보게 된 것이다. 반갑고 기뻐서 소리를 지르며 알밤을 주웠다. 한 개를 줍고 나니 바로 그 옆에 또 다른 알밤이 보여서 계속 주웠다. 할머니 산소의 성묘보다 알밤 줍는 일이 더 즐겁고 신났다.

고향 오일장도 나에게는 낯설면서 정겨웠다. 시골 장이라 온갖 장물들, 농산물을 비롯하여 어물, 축산물들이 인도를 꽉 메웠다. 무엇을 살까하고 이리저리 살피며 아내와 천천히 걸었다. 마늘, 무, 땅콩, 새우젓 등을 사고 맛있게 익은 홍시도 샀다. 홍시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걷노라니 옛날 시골장터를 걷던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흥이 일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거장 쪽을 향해 걷다가 나무벤치를 발견하고 거기 앉았다. 그 과정에 비닐봉지에 담긴 홍시가 흔들리면서 부딪쳐 성한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펴보니 홍시가 물러 터져 범벅이 되었다. 그냥 먹을 수가 없어 넓은 그릇에 부었다가 작은 그릇에 담아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고향의 5일장이 홍시 범벅으로 나를 대접해 주었다.

이제 한 열흘 정도 지나니 내가 사는 집을 좀 벗어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 정신문화를 꽃피운 곳인 도산서원을 향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학당이다. 〈퇴계집〉에 실린 글을 보면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몸은 은퇴하여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하건만 학문은 후퇴하여 늘그막에 근심이 되는구나. ‘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시내 위에 비로소 자리 잡고 살면서 흐르는 물에 날마다 돌이켜보네. 퇴계선생 자신의 겸손하고 신의로 사람을 만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퇴계선생은 간판 글씨도 작게 써서 보는 사람들에게 권위나 위압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이를 테면 ‘陶山書堂’이라는 글자도 벽의 기둥 넓이만큼 좁고 작게 썼다. 모든 것을 상대방이 기를 펴고 바라볼 수 있게 자신을 작고 낮게 표현하였다. 자신의 존재를 낮춤으로써 청빈함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서당 어디를 가더라도 편안하고 안정되었다. 이 과정을 보면서 퇴계선생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의 앞날도 어리석은 분수를 알아 흐르는 물같이 쉼 없이 돌아보기를 희망하였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나 이 순간 그런 마음을 갖게 되니 숙연해졌다.

그리고 삶의 공간을 좁혀서 나의 집을 꾸미는 데도 마음을 썼다. 그동안 집은 아내에게 맡겼는데 이제는 그 집도 함께 꾸미고 싶었다. 아내가 원하는 대로 준비하였다. 모처럼 실내를 꾸밀 화분을 사기 위해 교외 화훼농장으로 갔다. 그동안 명상센터를 운영하면서 온갖 화분을 주거나 받아왔는데 내 집을 위해 화분을 들여놓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라 마음이 들떴다. 여인초, 맛삼, 고무나무, 장미 등을 사서 햇볕이 드는 창 쪽으로 진열하고 보니 새삼 희망이 솟아났다. 그동안 화분을 이처럼 정성스레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놓고 보니 집안이 더 풍성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의식을 갖고 계속 바라보니 거실 안이 온통 꽃으로 가득해 보였다. 마음이 꽃과 하나 된 순간이었다.

집안을 정리하고 나니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산책을 하면서도 나무와 나무 사이가 붙어 있어서 나무 몇 그루가 길 전체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계속 같은 길을 걸으면서 나무를 보니 나무와 나무가 떨어져서 각각 독자적으로 서있는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바라보다보니 그 틈새가 훤하게 뚫려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인생이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흔히 말하듯이 역마살이 낀 것처럼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지 못하고 옮겨 다녔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중등학교 교사로, 중등학교 교사에서 연구기관의 연구원으로, 연구기관에서 대학교수로, 학문의 발전 측면에서 이동은 불가피하지만 공간의 이동도 삶과 함께 이루어졌다. 

경북 봉화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안동으로 옮기면서 마음의 분열도 일어났다. 본래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 대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고 하지만 주변의 물리적인 변화를 의식적으로 관리하지는 못하였다. 내 나이 팔십이 가까워서야 내 인생이 이처럼 변화하고 있음을 보았고, 이제는 의식적으로 그 변화를 조절할 수 있는 기회도 갖기 어려운 나이가 된 것이다. 인생이 이처럼 덧없이 흘러왔다. 

어떤 사람이 임제에게 물었다. “누가 와서 스님을 마구 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임제가 이렇게 말했다. “오라고 하라. 오기 전에는 나도 모른다. 웃을지도 모르고 울지도 모르고 뛸지도 모른다. 아니면 거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오면 그 순간에 결정할 것이다.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전체성이다. 오기도 전에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내가 어떻게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깨달은 사람은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그는 신의 손안에 있으며 일이 일어나는 대로 내맡길 뿐이다. 깨달은 사람은 그 순간에 맡긴다. 순간에 모든 것을 만난다. 온 존재계가 그 순간에 참여한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무의식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삶의 모든 습관에 깨어있으면 습관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습관에 협조하지 않게 된다(손민규 역, 쉼, 2004).
희망은 갖되 희망이라는 미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삶이 흘러가는 길은 희망이 안내하는 방향이다. 사실 나는 제주로 갈 때 일생동안 제주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35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왔다. 그런데 누가 알겠는가? 깨닫지 못하니 마음으로 살 수밖에. 그래서 안동으로 왔다. 이제는 물리적인 변화도 정신적인 변화도 희망은 갖되 순간에 머무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