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남 장편소설 아디카야의 검] 40. 트리운트 사원에 이석원 행적이…
40. 여기 있었군 1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그림쟁이 오빠가 시오레 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안 것은 술집 생활을 시작한 지 꽤 지나서였다. 오빠가 처음 우리에게 접근했을 때 한국에서 들어온 여행객인 줄 알았다. 여행비가 떨어져 떠도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오레 언니가 빚이 있어 쫓기고 있었는데 그 빚을 오빠가 갚아 주었다. 이 바닥을 잡은 오빠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릴 때부터 배운 선무도로 세 명을 때려눕히고 시오레를 구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보기에는 비실거려 보이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들어와 활개를 치면 가만두지 않는데 오빠가 주접을 떨어도 이제 그러려니 하고 만다. ‘저 자식 웃긴다니까 비실거려도 제대로 날고 긴다니까.’ 그러고 만다. 그 후부터 우리는 오빠를 아디카야라고 부른다. 순수한 마음의 원초신. 우리를 구원하는 수호신. 천사가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그럴 수는 없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렇게 영혼이 맑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 사창가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어 주고 있는 사람. 갈 곳 없는 늙은이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고 밥을 먹여주고, 그들의 몸을 씻겨 주고, 발을 씻겨 주고, 옷을 꿰매 주고…. 예전에 우리를 도와주던 성당 수녀님이 와서 그랬다. 욕망이 들끓는 지옥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이라고. 시오레 언니는 가끔 차라리 몸을 팔더라도 아디카야 오빠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오빠와 뱀을 잡아 팔아 배고픈 사람들의 양식을 장만하고는 했는데 뱀을 잡기가 무섭단다. 그림쟁이 오빠는 시오레 언니에게 셋집도 마련해주고 어쩌든지 이곳에서 건져내려고 하지만 시오레 언니는 빗나가기만 하고 있다. 나를 구해주세요! 나를 구해 달란 말이에요! 그랬던 시오레 언니인데. 시오레 언니도 요즘은 가슴이 아픈 모양이다. 새벽에 일어나 보면 가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시오레 언니가 아디카야 오빠가 얻은 셋집에서 살았다고 하던데 알고 있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오오스마 기자가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사람들을 데리고 셋집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지내라고. 그런데 주인이 내쫓았어요. 여기가 창녀 집이고 걸뱅이 집이냐며. 그날 아디카야 오빠가 써놓은 글을 보았어요. 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해 세 든 집을 내놨다고. 셋돈을 빼 다리 밑에 천막이라도 치겠다고.
-그 오빠가 지금 어딨는지 모르오?
역시 오오스마 기자가 물었다.
-몰라요. 언젠가 천추사원 공사가 다 끝나간다고 그러면서 한국으로 나갔다 온다고…. 그 후론 모르겠어요. 지금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소?
역시 오오스마 기자가 물었다.
-다리 밑에요. 갈 곳 없는 식구들이 벌써 스물다섯 명이 넘었어요. 아디카야 오빠가 쳐준 천막을 나라에서 뜯으라고 하는데, 국유지라고….
문득 밖을 내다보자 찻집 앞으로 벤츠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 지옥 속을 저들은 무슨 복으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어제도 없는 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을 돼지 취급도 하지 않는다. 더럽다며 먹지 않는 돼지고기보다 못한 인간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며칠 전 시오레 언니가 죽었어요.
-네?
하나 같이 입을 벌리고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나는 시오레가 집을 나갔다고 하던 주인 여자를 떠올렸다.
-술집을 나간 것이 아니에요. 시오레 언니가 죽자 이빠오레 언니가 도망가 버린 거죠.
-근데 왜 주인 여자는 시오레가 집을 나갔다고?
-모르겠어요. 시오레 언니 죽기 전날 밤. 이 골목을 잡은 왕초한테 눈에 멍이 들게 두들겨 맞다가 결국 그놈이 휘두르는 칼에 배를 찔렸거든요. 번 돈 반을 떼어 모으다 보니 그놈에게는 아디카야 오빠가 눈엣가시였을 거예요.
-그래 범인은 잡혔소?
오오스마 기자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주인 여자가 숨기고 있는 거 같아요. 주인 여자가 어제도 그랬어요. 아디카야란 놈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몸 파는 애들이 한푼 두푼 모아 아디카야 오빠가 세운 사랑의 모임에 내놓거든요. 그 오빠 때문에 몸을 팔지 않고 뱀을 잡으러 다니는 애도 있어요. 그러니 술집 주인이 가만 있겠어요. 그 오빠 지금 트리운트 사원에 있다는 말이 있던데 만나면 이곳에 얼씬도 말라고…. 그래서 나온 거예요.
오오스마 기자가 달려오는 택시를 잡고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 길로 바로 그녀가 말한 트리운트 사원으로 갑시다. 내가 그곳을 알고 있으니.
네 사람을 태운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트리운트 사원이 있는 외진 마을에 닿은 것은 한 시간을 달려 해가 뉘엿거릴 무렵이었다. 차를 마을에 정차한 다음 어울려 사원으로 올라갔다. 이곳저곳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 뒤로 둥그스름한 산들이 어깨동무하듯 누워 있어서 한결 더 정겨워 보였다.
길도 닦이지 않은 사원이어서 작을 줄 알았는데 초원을 헤쳐 등성이를 넘어가자 다시 마을이 나오고 제법 큰 사원이 보였다. 절 이름은 이 나라에 맞추었지만, 이곳도 한국 절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사원이었다. 우선 원주스님을 찾아 이석원에 관해서 물었더니 지안 금어가 천추 사원에 머물면서 가끔 찾아와 탱화 작업을 하던 곳이라고 했다. 지안 스님의 아들 이석원도 함께 머물렀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지안 금어가 살아 있을 때 그린 그림이 칼을 맞고 몇 점 모셔져 있었는데 성치 못하였다.
-탱화가 찢어졌군요?
내가 이석원을 생각하며 원주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날 제 아버지와 그린 그림을….
-이석원 짓이군요?
오오스마 기자가 끼어들자 원주스님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십니까?
-이곳만 그런 게 아닌가 보더군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작업할 땐 순한 양인데….
그의 안내로 지안 금어가 살아 있을 때 그렸다는 극락과 지옥의 길이라는 작품이 보관된 곳으로 갔다. 다포로 지어진 낡은 건물이었는데 창을 열자 거대한 그림이 나타났다. 붓다의 일생이 수놓아진 그림이었다. 천추사원에서도 이런 유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다.
그림 위를 덮은 유리가 깨어져 있었다.
-이것도 이석원의 짓인가요?
심 작가가 원주스님에게 물었다.
원주스님이 머리를 내저으며 웃었다.
-아닙니다. 더 좋은 틀을 만들어 넣으려다가 그만…. 그러잖아도 천추사원으로 기별을 놓을 참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들어가시지 않았으면 지안 스님을 모시려고….
-아직도 모르시는군요?
오오스마 기자가 눈치를 보며 말하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듣고 난 원주스님이 기가 막히는지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후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원에서 제일 웃어른이라고 하는 조실스님에게 네 사람을 인사시킨 다음 이곳까지 오느라 시장할 텐데 공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공양간으로 데리고 갔다. 차려다 주는 음식을 받아 보니 자빠디 한 쪽이었다. 시장기가 돌아서인지 먹을 만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자 사미가 오더니 원주스님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어떻게 시장기는 달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주가 네 사람에게 물었다.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사미가 차를 내오자 원주스님이 찻잔마다 차를 따랐다.
-이런 말을 해서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깨어진 성화만 보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아마도 그림에 미치다 보니 그런 짓을 한 모양인데….
-그래요?
오오스마 기자가 그제야 눈을 빛내며 물었다.
-사실 이 사원은 그놈에게 고향 같은 곳이지요. 그놈이 제 아버지를 따라 이 나라로 드나들면서 처음 머물렀던 곳이 여기였으니까요.
-우리는 천추사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오스마 기자가 말했다.
-천추사원에서 그들을 모시기는 했는데 이석원이는 이곳이 좋았던가 봅니다. 틈만 나면 드나들었으니까요.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듣고 있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근에도 들렀겠군요?
내 물음에 원주스님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자. 한 며칠이나 되었나?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래요? 그럼 그 후로 연락이 없었나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며칠이나 묵었다 갔습니까?
아쉬운 듯 대답하던 나는 원주스님을 향해 다시 물었다.
-한 이틀 묵었을 겝니다. 지안 스님 잘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가는 날 자신이 그린 탱화를 찢어 버렸어요. 제 아버지를 죽이고 불태웠을 줄이야….
원주스님이 더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럼 그가 여기로 오면 기거하는 방이 있었을 텐데요? 쫓기면서 그가 의지한 곳이 여기였다면 말입니다?
-아무튼 이상한 놈입니다. 소문에 들으니 늘 가난한 이웃들을 구한다고…. 아니 여기로 들어온 지 얼마나 된다고. 언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곳을 동경했다고. 붓다가 태어난 곳이고 법을 펴신 곳이니…. 그런데 이곳으로 들어와 보니 지옥을 봤다고 했습니다. 지옥. 그 지옥이 밤마다 자신을 부른다고…. 그러다 미쳐버린 모양입니다. 자주 천추사원을 나와 구걸해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갔고, 그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그런데 그 아이가 제 아비를…?
-그의 소지품 같은 것이라도 있을 것 같은데요?
스님의 심중을 알겠지만 내가 계속 물고 늘어졌다.
-글쎄요. 그가 쓰던 방도 이미 다른 이가 들었고, 그가 가고 난 뒤 보니 책 한 권이 떨어져 있더군요.
-책?
-그걸 어디 두었을 텐데…….
-경전이었습니까?
-경전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걸 좀 볼 수 없을까요?
원주스님이 남은 차를 후루룩 들이켜더니 잠시 후 누군가를 불렀다. 이제 25살이나 되었을까. 젊은 스님이 나타났다.
-가서 이석원 금어 책 좀 내어 드리거라. 저번에 다락에 넣어 두지 않았느냐.
-네. 그러겠습니다.
-따라들 가시지요. 전 곧 예불을 올려야 해서….
네 사람은 스님을 따라나섰다.
이석원이 거처했다는 방은 본당을 지나 대중 처소 한 쪽에 있었다.〈계속〉
▶한줄 요약
이 기자 일행은 이석원의 행방을 찾기 위해 트리운트 사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석원의 행적을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