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사찰 법정사, 항일기지 역할 수행”

봉려관불교문화硏, ‘근대제주불교사, 그 진실을 찾다Ⅲ’ 세미나 혜달스님,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 ‘정구용’ 1918~23년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분석해 1918년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 총지휘 스스로 불무황제, 성덕주인 등 칭하며 “日 내쫓고 민족 구제, 불교 포교” 주장 ​​​​​​​“법정사 운동 주체 보천교” 주장은 왜곡

2023-10-21     제주=신중일 기자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 스님이 ‘정구용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을 발표하고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1919년 음력 93일 불교도가 중심이 돼 펼친 제주도 최초이자 최대 무장항일투쟁이지만, 한 때에는 보천교의 난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19918정구용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을 김봉옥 씨 등이 발굴해 비로소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바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부 연구자들은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체를 보천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왜곡되고 있는 근대제주불교사를 바로 잡기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원장 혜달)1021일 제주시 테크노파크(벤처마루) 101001호 세미나실에서 근대 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왜곡되고 있는 근대 제주불교사를 바로 잡기 위해 시작된 봉련관불교문화연구원의 노력은 지난 2019제주의 여성리더 봉려관, 항일의 꽃을 피우다를 주제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을 시작으로 2021년부터는 근대 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시리즈로 이어져 올해로 3회째를 맞았다.

(사)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은 10월 21일 제주시 테크노파크(벤처마루) 10층 1001호 세미나실에서 ‘근대 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Ⅲ’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 스님은 정구용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을 통해 정구용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을 새로 번역·교감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

혜달 스님이 새로 번역·교감한 정구용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법정사는 봉려관 스님이 1911년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법돌사(法凭寺), 법정암 등으로 명명됐다. 1918년 당시에는 김연일 스님이 법정사의 주지 소임을 보고 있었다.

판결 기록에는 김연일 스님이 평소 제주도에서 일본인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법정사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1918년 음력 6월 방동화 스님이 박주석을 찾아가 법정사로 와 달라요청했고, 음력 84일 법정사로 찾아온 박주석에게 김연일 스님은 거사 계획을 설명했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박주석은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연일 스님은 제주도에서 일본인 전부 내쫓은 후, 육지로 나가서 불교를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방동화 스님이 법정사에서 항일거사대의 인원 확충 방안을 수립했고, 김연일 스님과 심복들도 이에 찬성했다.

이들은 음력 93일 법정사를 출발해 각 지역을 경유해 서귀포를 습격한 후 94일에는 제주성을 습격할 계획을 수립했다. 김연일 스님은 항일거사대의 역할도 정했는데 선봉대장에는 장림호(거사 당시엔 강창규), 좌우대장엔 방동화·강민수, 중군대장 양남구, 후군대장 김삼만이 맡았다.

음력 91, 2일에는 법정사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 김연일 스님은 대중에게 나는 불무황제(佛務皇帝). 일본인 관리를 제주도에서 추방해야 한다. 모두 내 명령에 따라 명령을 부락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을 모집하라고 명령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지

항일 거사에 참여한 인원은 34명으로, 이들은 격문과 깃발 6, 화승총 3, 몽둥이 수십 개로 무장하고 음력 93일 새벽 법정사에서 출정했다. 출발 직전 법정사 경내에 깃발을 세워놓고 기도를 하며 출정식을 했고, 이 자리에게 김연일 스님의 비범함과 항일 거사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정구용이 했다.

출정한 항일거사대는 상동에서 영남리-호근리-서호리-강정리-도순리-하원리-중문리로 나아갔다. 34명으로 시작된 항일거사대는 중문리에 당도했을 당시에는 300~400명에 달했고, 중문리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 주재소 서편을 방화하고 시설을 파괴했다. 하지만, 말을 탄 순경들이 총을 쏘며 달려왔고, 항일거사대는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혜달 스님은 재판부가 판단한 법정사 항일거사대 구성원은 불교신도와 농민이라며 법정사를 출발할 때 34명 중 상당수가 불교도일 개연성이 높고, 상동에서 중문리 경찰 주재소까지 각 마을에서 모집한 인원 400명은 대부분은 농민으로 판단된다. 몇 명을 제외한 이밖에 대다수의 가담자를 특정종교인으로 판단할 근거는 없다고 밝혔다.

이어 법정사 항일운동은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안위는 차치하고 국가와 민족만을 염두한 지도부, 자의·강제적으로 가담한 평범한 제주도민의 투쟁이었다이 같은 항일항쟁의 정신과 의미 선양을 뒤로 한 채 법정사 항일항쟁에 종교성을 입히는 연유가 무엇인가. 법정사 항일운동은 불교계의 전유물도 보천교의 전유물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제주 쌍계암 주지 상민 스님이 발표하고 있다. 

법정사는 항일핵심인물들이 총집결했던 거점지였고, 항일기지로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한 혜달 스님은 앞으로 연구자들은 미공개된 법정사 항일인사의 판결문과 재판 문건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제안하며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연구성과가 도출됐을 때, 비로소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이 19193.1운동을 견인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의 성격 조명을 발표한 제주 쌍계암 주지 상민 스님은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전반을 소개하며, 김연일 스님이 스스로를 불무황제, 성덕주인, 옥황상제라고 지칭한 의미에 대해 살폈다.

상민 스님은 김연일 스님이 스스로 불무황제라고 칭한 것은 수행자로서 보살도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라며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 은혜(四恩, 삼보·국왕·부모·중생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은 불무황제라는 호칭을 빌어 보살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성수 불교신문 기자는 일제강점기 제주불교 인물 연구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불교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태민, 최원순, 김근시 등 인물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성수 불교신문 기자는 ‘일제강점기 제주불교 인물 연구’를 발표하고 있다.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이 10월 21일 개최한 '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 세번째 시리즈 세미나에서 발표자들이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