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남 장편소설 아디카야의 검] 36. 성물을 만다라에 숨긴 조실은 열반에…
36. 보석을 찾는 이 2
-이상한 것은 그해에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는 거요. 내가 불교도이다 보니 그 친척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후손이 없었소. 정부가 그곳을 장악했고 그 후는 모르겠소. 일 년 후인가 그리스도의 지팡이라며 공개되었으니 보디 아이슈 무쿠암이 잊힐 수밖에.
-그럼 보디 아이슈 무쿠암의 성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남기신 칼이 맞군요?
확인하는 듯한 내 물음이 너무 컸던지 늙은이가 꿈틀 놀라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두 무쿠암의 성물이 예수의 지팡이라는 추측이 있었소. 하지만 무엇보다 이 땅에 불교가 먼저 들어왔고 나중에 예수가 등장했는데 그를 신봉하는 집단들은 불교도에 밀려 전도하기가 힘들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나 싶소.
늙은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섣불리 입을 열 만한 사항이 아닌데도 자신이 지키던 성물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그제야 하나 같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게까지 헷갈릴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다들 들었던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분명히 그 성물이 석가모니 붓다의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혹시 아니라고 하면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쓰잘머리 없는 말이나 늘어놓으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었다.
-실례지만 보디 무쿠암으로 가보니 전과는 달리 텅 비었더군요. 그럼 그 성물이 어딘가로 옮겨졌다는 말인데….
오오스마 기자가 먼저 감정을 정리하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비로소 보디라는 말을 정확하게 붙이고 있었다.
-그거 주인 찾아갔소이다.
늙은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비로소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말려 말이 많았나 하는 낯빛이었다.
-네?
이번에는 심 작가가 물고 늘어졌다. 노인이 그를 향해 눈을 치떴다. 그는 그곳의 주인이 당신이 아니냐 하는 눈빛을 심 작가에게서 읽었는지 이내 눈을 감았다. 늙은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잠시 후 고개를 내저었다.
-난 본시 주인이 아니었소.
-무슨 말씀이신지?
심 작가의 물음에 그가 하하하고 웃었다.
-본시 제 것이 어디 있겠소.
-예?
생긴 모습이 영락없는 농부 같은데 성물을 지키고 살던 사람답게 제법 말에 멋을 부렸다.
-이 세상에 본시 내 것은 없단 말이오.
-아, 네.
-이번에 가보니 석관만 덩그렇게 남았더군요.
오오스마 기자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 성물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늙은이가 그렇게 묻는 심 작가를 갑자기 무섭게 노려보았다.
-왜 어디 있다고 한다면 찾아가시게?
-아 아니 그게 아니구요.
-그럼 어디 있든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로 인해 이상한 일들이 생겨서 말입니다.
-이상한 일들이라니?
-그 대답은 내가 하지요.
하는 말이 목 밑까지 찼다가 도로 꿀꺽 넘어갔다. 아직은 심 작가처럼 이곳 말이 입에 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오스마 기자가 대신 나섰다. 늙은이가 오오스마 기자를 쳐다보았다. 오오스마 기자는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대충 말했다. 늙은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이상하군?
-네?
심 작가가 다시 나섰다.
늙은이가 무슨 느낌이 있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구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늙은이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잡혔다.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침묵과 정적. 누가 소리라도 내면 늙은이가 입을 다물어 버릴 것만 같은 불길함 속에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한순간 결심을 굳힌 늙은이의 음성이 떨어졌다.
-그렇소. 그 성물은 우리 가문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소. 이미 소문이 났다시피…. 오랜 세월을 거치다 보니 성할 리가 있겠소. 내 위로 오 대째쯤 사원을 지어 성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소. 한 마디로 그 성물을 모셔놓고 밥벌이하겠다는 그런 무리들 말이오. 아마 오시면서 보았을 것이오. 미륵보살님이 서 계신 모습을.
-예. 보았습니다.
오오스마 기자가 대답했다.
-엄청나더군요.
-이곳 주민들의 염원이지요. 미륵보살님이 세상에 와 구해주기를 하나 같이 염원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그런데….
늙은이가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요?
오오스마 기자가 기다리다가 물었다.
이윽고 늙은이가 눈을 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못 할 말이 어디 있겠느냐는 낯빛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곳에 왔다고 하는 것이오. 사람들은 그가 미래에 오리라던 미륵불인 줄 알았다고 하오.
-그럼 아닌가요? 세상에 와 수많은 이적을 베풀지 않았나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이곳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해 왔었다면 그가 곧 미륵불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늙은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 고갯짓이 그럴까요? 하고 되레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이내 그 느낌을 증명하듯 늙은이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이적을 베풀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천지가 개벽하는 세상은 오지 않았소. 세상은 예수를 추앙하는 이슬람 문화권으로 뒤바뀌었을 뿐….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정말 미륵보살이었겠냐 하는 것이오. 이곳에서 그걸 믿는 사람도 없지만, 미륵보살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소. 부처님이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군요.
오오스마 기자가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늙은이의 말이 이어졌다.
-오다가 본 그 미륵불은 우리 일가붙이들이 모신 것이오. 그래서 더욱 깨달음의 동굴을 지키려고 했을지 모르오. 그럼 예수의 지팡이가 있다는 아이슈 무쿠암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떻겠소. 조상이 술탄의 지방행정관을 지내며 후손들이 잘살기를 바랐겠지만, 부처님이 살았을 때부터 그를 믿어온 조상도 우리 조상이 아니겠소. 그래서 갈라지게 된 것이오. 아이슈 무쿠암을 옹호하는 무리들과 보디 무쿠암 즉 깨달음의 칼을 지키려는 무리들이 말이오.
-아이슈 무쿠암과 보디 아이슈 무쿠암이 그래서 갈라지게 되었다 그 말이군요?
정리하듯 오오스마 기자가 물었다.
-맞소이다. 정부에서 깨달음의 동굴에 성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내놓으라고. 그러나 정부에서도 가져가지 못했소. 접근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오. 나라에서 무쿠암에 군대까지 주둔시키긴 했는데.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그걸 훔쳐내려고 하다가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소. 그러니 어떡했겠소. 군인들은 성물을 건드리면 죽는다고 소문을 퍼뜨릴 수밖에. 그런데 이상하긴 이상합디다. 성물이 내 대까지 지켜질 것이라고 윗대에서 말했었기 때문이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되물었다.
-글쎄 모르겠소. 내 대에 이르러 다섯 번째 오는 검은 범의 해, 7월에 그 성물을 다람살라에 있는 이움사원에 갖다 맡겨라. 그럼 그 성물의 임자가 와 찾아가리라. 그렇게 전해왔다는 것이오. 올해가 범의 해가 아니오. 죽을 각오를 하고 성물에 접근했는데 희한하게도 탈이 없었소. 그래 그 성물을 이움 사원에 갖다 맡겼소. 군인들 몰래 말이오.
-그게 무엇이던가요? 칼이 맞던가요?
내가 물었다.
늙은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소. 낡은 보자기에 싸여 있었으니까.
-풀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무서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소.
-그럼 그 성물이 이움 사원에 있겠군요?
내가 다시 물었다.
-내 말을 더 들어보오.
늙은이가 침중한 목소리로 나를 제지했다.
-7월에 그 성물을 맡기고 안심이 안 되어 두 달쯤 있다가 갔었소. 그런데 그 두 달 사이에 성물이 없어진 것이오.
-없어져요?
내가 놀라 되묻자 늙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소. 그 성물이 어딨느냐고 했더니 기가 막힙디다. 그 성물을 내게 받은 인물은 그 사원의 조실 되는 란층이라는 스님이었소. 그 스님은 성물이 예사 물건이 아님을 알고 제 딴에는 묘한 꾀를 내었던 모양이오. 그만이 아는 곳에 숨겼으니 말이오. 그곳은 바로 부처님상 뒤에 거는 만다라(曼茶羅) 속이었소.
-만다라?
만다라가 무엇인가. 우주법계를 상징하는 탱화다. 사원에 가면 보이는 그림.
어디선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는 정적 그 자체였다.
늙은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성물을 만다라 속에 숨기고 꼭 열흘 만에 그 조실이 갑자기 숨을 거두었지 뭐요.
-죽어요?
역시 내가 물었다.
-그렇소. 갑자기 말이오. 사인은 심장마비였소. 자다가 멀쩡히 숨이 멎은 거요. 그러니 그 성물이 어디 있다는 말도 못 하고 죽은 것이오.
-저런!
듣고 있던 송 서화가가 혀를 찼다.
-그가 죽고 삼 일이 지나자 비가 오기 시작했소.
-갑자기요?
송 서화가는 완전히 몰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비는 5일 동안 쉼 없이 내렸소. 그러자 멀쩡하던 지붕이 갈라지고 비가 새기 시작했소. 비가 새기 시작하자 막을 사이도 없이 만다라가 비에 젖기 시작했소. 만다라가 엉망진창이 되자 조실 뒤를 이은 주지스님이 비가 개면 금어를 모셔 와 다시 새 만다라를 그려 걸리라 생각했소. 그런데 다음 날 밤, 한 젊은이가 그 절로 찾아든 거요. 이곳저곳 돌아치며 만다라를 그리는 젊은이었소. 한국인이라고 했소. 어떻게 한국인이 이곳까지 왔느냐고 했더니 자신은 만다라를 그리는 금어인데 이 나라의 그림을 연구하던 중 왔다고 하드라오.〈계속〉
▶한줄 요약
왈리 슈트라 쉼라는 조상으로부터 받은 성물을 전해오는 예언대로 이움사원으로 옮겼고, 성물을 전해받은 조실스님은 열흘만에 입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