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휴 스님의 능가경 강설] 37. 오온을 ‘나’라고 하지 않는 용기

37. 태어남이 괴로움

2023-10-06     지휴 스님((사)여시아문 선원장)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콩을 심어 콩이 나고 팥을 심어 팥이 나는 이치들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이치를 벗어난 마음을 가진다면 염치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미 주어진 세상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그만큼을 원해서 지금 그렇게 일어나고 있는 것뿐이므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각양각색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사실은 없다.그 차이는 사람의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각자의 마음 작용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마음 작용은 한두 번 가진다고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도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하듯, 태어나서 나타나는 작용들도 아주 많은 노력의 결과들이다. 사람들에게 바라는 모양으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더라도 실천하는 일은 쉽게 되지 않는다. 당연히 피나는 노력을 전제하므로 만족하는 결과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순환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항상 일어나는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순환하는 삶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지만 절대로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복을 쌓더라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아무리 악한 일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뉘우치고 좋은 일을 하여 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삶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은 삶인지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물에 빠진 사슴을 구해주는 일은 판단하기 쉽지만, 배고픈 사자와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사슴을 보았을 때,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인연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파충류를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살아있는 곤충을 아무 생각 없이 먹이로 쓴다. 어릴 때는 몰라서 할 수도 있는 일이라지만 안다면 할 수 없는 일인데, 세상은 인연 따라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인연의 일에서는 옳은 것을 찾을 수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순환이 괴로움이라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순환의 괴로움이 생겨나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멈출 수밖에 없다. 지혜로 보면, 좋은 인연을 심어 좋은 열매를 따서 그 태어남 속에 풍요롭게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낼 수가 없고, 좋은 인연을 심지 못해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장애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도 낼 수가 없다. 그저 분별하여 판단할 수 없음에 대한 마음의 갈등을 자세히 살펴볼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서서히 살펴본다는 것 자체가 판단이라는 것을 알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알게 모르게 모든 것에 대해 ‘나’라고 하였고, ‘나의 것’이라 하였고, ‘내가 있다’고 하는 마음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계는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이 흐르는데, 그 속에서 나라는 생각으로 보고 있는 그 마음 작용으로 괴로움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으로 쉰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서 보편적 사고만 있을 뿐, 밀고 당길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세상에 무슨 이치가 있는 줄 알고 미리 겁을 먹고,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상하여 일으킨 자신의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과 일치하는 어떤 결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어긋나게 되었던 것이다. 살면서 인생의 충고는 듣기 쉬워도 지혜의 소리는 듣기 어렵다. 설사 듣더라도 한 마음을 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태어남이 괴로움입니다”라고 알려주면 누가 이것이 참다운 진리인 줄 알겠는가?

우리는 항상 진리를 듣고 기뻐하기보다는 ‘지금 이렇게 생겨난 것을 나보고 어쩌라고!’ 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버린다. 진리는 지금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듣고 바로 알아서 상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버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