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남 장편소설 아디카야의 검] 34. 문수사리보살이 칼을 내려놓고 사라지고…
34. 보석을 찾는 이 1
심 작가의 말에 내가 웃었다. 오오스마 기자와 심 작가를 안 지 꽤 되었어도 이런 말을 나누어보지 않았는데 그만큼 가까워진 것인지도 몰랐다.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생각이 나네요. 이 문제를 지혜나 어리석음으로 풀어 버리는 보살이….
-그가 누군가요?
심 작가가 사심 없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바로 뇌천(雷天)보살이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이 지혜(明)와 어리석음(無明)이 서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고 하더군요.
-어렵네요.
-어렵지요.
-어리석음의 본성은 곧 지혜요, 이 지혜를 지혜로써 집착하지 않을 때 이것이 절대 평등한 경지다? 그러네요. 절대? 더할 수 없이 큰 세계. 그것의 본질. 어렵네요.
-다음 말을 들어보면 더 어려워집니다. 명(明)은 지혜다. 무명은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진리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 속에는 무엇이 숨 쉬고 있는가. 그것이 지혜다. 밝음이다. 어둠을 밝히려는 불빛이다. 그것들이 깜박거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그 밝음조차도 거기에 있다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심 작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들의 본질이 절대라는 말이지요. 불법의 오묘한 진리. 그것이 거기 있다는 말입니다. 본시 그 속성 속에는 일체가 떠나 있을 테니까요.
-거기에 오로지 절대 평등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인가요?
-붓다가 있을 뿐이라는 말이겠지요.
‘예측할 수 없는 절대의 세계가 바로 그 세계일뿐이다. 왜냐하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합쳐진 것이 몸의 실상이지만 거기에는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我)는 두 가지가 있다고 들었다. 진아(眞我)와 소아(小我).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진아요, 소아는 외연에 의해 만들어진 나 자신이다.’
그런 말을 덧붙이려다가 나는 그만두었다. 너무 내가 아는 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 고(苦)와 락(樂)이 주인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내가 없다는 것은 바로 소아를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소아가 없으면 욕망도 없다. 생겨난 내가 없는데 생겨난 병이 있을 리 없다. 모든 마음 작용은 오직 법의 일어남이다. 법으로서 이 몸을 이루었기에 이 몸이 일어나는 것도 오직 법이 일어남이 아니겠는가. 이 몸이 없어지는 것도 오직 법이 멸하여 없어지는 것. 그러나 문제는 그 법을 내가 알지를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 법이 일어날 때 내가 일어나는 게 아닌 것이다. 법이 멸할 때도 내가 멸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로써 증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것이 각각 알지를 못한다면 도대체 그곳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진실(實)과 허위(不實)가 증명해 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실과 허위는 서로 대립한다. 그럼 진실을 보는 사람은 진실까지도 보지 않는다는 데 이 문제의 핵심이 있다. 하물며 허위를 보겠는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심 작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궁금하네요. 이 미륵불 앞에서 기도하던 노인네 말입니다. 미륵불을 다시 만났는지…?
심 작가가 웃었다.
-글쎄요? 만나지 않았을까요? 그럼 뭐라고 했을까요? 미륵불이….
-이런 생각이 드네요. 수행하는 스님들 말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묻지 않습니까? ‘요즘 공부가 잘되어가느냐?’ ‘네.’ ‘나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스승은 제자를 향해 손을 내밀지요. ‘그럼 그 나를 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라.’ 아마도 제자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며 지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럼 스승은 뭐라 할까요? 세상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웃을까요? 아니면 제자의 머리를 치며 이렇게 말할까요? ‘틀렸다. 너는 도를 이해하려 한다. 진리는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 오로지 체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잘 들어라. 지혜의 눈에는 본다는 것도 보지 않는다는 것도 없다. 이것이 나의 본모습이며 절대 평등의 경지다.’ 때로 글을 쓰다가 에라 할 때가 있습니다. 에라 정말 출가나 해 버릴까?
-글 쓰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지요.
듣고 있다가 내가 말했다.
-작년까지도 그 생각이 문득문득 들고는 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정말 에이 싶더군요. 그래 가 버리자. 정말 출가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꿈을 자주 꾸는 겁니다.
-꿈이요?
내가 되물었다.
-꿈만 꾸면 사자들이 내게 달려오는 겁니다. 발톱을 드러내고 출가한 날 무는데 내가 사자들에게 묻곤 했지요. 왜 하필이면 날 잡아 먹으려 하느냐고. 그러면 사자들이 네놈은 먹기가 좋을 것 같다고.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요. 머리카락이 없어서 말이다.
-하하하 재밌네요.
-지금도 가끔 그 꿈을 꿉니다. 꿈을 꿀 때마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어머니를 찾고는 하는데 그러면 멀리서 검은 말들이 사나운 바람처럼 달려오지요. 검은 갑옷을 입은 사자(死者)들이 말입니다. 긴 창과 칼, 그리고 쇠방망이를 들고 있어요. 담장을 뛰어넘어 날아들어 온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자들을 쳐 없앱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저 살기 어려워 대필 작가나 하던 사람인 줄 알았더니 언제나 출가를 생각하던 사람이었다니. 그의 방황이 손에 잡힐 듯해 나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심 작가가 슬며시 몸을 돌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미륵상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미륵을 향해 힐난을 퍼부었다는 한 제가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마!
그가 오늘 있다면 생의 언저리에서 이렇게 서성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할까? 그때도 이런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미륵불에게 그는 그런 힐난을 퍼붓지 않았겠는가.
-그대가 붓다로부터 다음 세상을 구하리라 수기를 받았다고 하는데 들어봅시다. 중생들을 어떻게 구하실 것인지. 보이시오? 저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이? 미륵이 이 세상에 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내가 보니 그대는 독각승에 지나지 않구려. 도대체 내세에 무엇으로 당신이 세상을 구한단 말이오?
유마의 힐난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는 미륵. 그리하여 대승사상을 얻어내었다는 미륵.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오오스마 기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조각상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더군요.
돌아보니 오오스마 기자가 미륵 보살상을 올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이 내가 쳐다보았다.
-불교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이곳 사람들은 알고 있지요.
오오스마 기자가 대답했다.
-유명한가 보네요?
송 서화가가 끼어들었다.
-나도 오늘 알았습니다. 언젠가 들어보았거든요. 세계에서 제일 큰 미륵불이 여기에 있다고…. 정말 크긴 크네요.
다시 올려다보아도 새삼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신통력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면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수행승이 신통력으로 조각하는 사람을 데리고 도솔천이라는 곳으로 올라갔답니다. 장래 석가모니와 같은 붓다가 될 보살을 뵈려고요. 보살의 관상을 세 번이나 본 뒤에 지상으로 내려와 그대로 조각했답니다.
오오스마 기자의 말에 심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요. 저 보살상이 완성되자 그제야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간 것이라는 말이 나왔지요. 그러니까 바로 여기가 동쪽 불교의 발원지란 말입니다. 성물의 임자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여 검색해 보았더니 이곳은 본시 쉼라 가문의 본거지였어요.
-그래요?
송 서화가가 말을 받았다.
-이곳에는 저 보살상을 지키는 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전설을 읽어보니 성물을 가진 쉼라 가문의 조상이 왜 이곳에 본거지를 틀었는지 비로소 알겠더군요.
-그래요?
이번에는 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역시 성물에 대한 전설입니다.
-전설?
-사실은 그 성물이 부처로부터 아난다에게 바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해요.
-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며 내가 되물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었답니다. 중생들에게 과거의 업장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옥이니 극락이니…. 문수사리 보살은 교단 내의 기강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겁을 주고 있거든요. 그래 칼을 들고 부처님을 죽이려고 나섰다는 겁니다. 부처라도 중생을 괴롭힌다면 죽여 마땅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요?
송 서화가가 물었다.
-문수사리가 칼을 들고 달려들자 부처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해요. 오히려 이렇게 물었답니다. 누굴 죽이려는 것이냐? 문수가 대답했답니다. 부처라 하더라도 중생을 괴롭힌다면 죽여 마땅하다.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나는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
-딴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뭐 해석이 분분하다는데 진상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고 하더군요. 진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길로 문수는 부처님이 내린 칼을 놓고 장엄사라림으로 가버렸다고 하더군요. 그 칼은 아난다에게 전해졌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아난다의 제자 상나화수를 거쳐 자이누딘 왈리 마하라 쉼라에게 전해지자 이곳의 용왕이 연못으로 끌고 들어가 죽이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미륵보살이 나타나 그를 구했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 찾아가고 있는 왈리 슈트라 쉼라 집안이 미륵보살의 피붙이들이라는 겁니다.
-아아!
송 서화가의 탄식 소리가 들렸고 나는 입을 벌린 채 심 작가를 쳐다보았다.
-미륵보살의 손들이라….
오오스마 기자가 뇌까렸다.
심 작가가 제 말에 취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오스마 기자가 마침 지나가는 촌부들을 향해 기회를 놓칠세라 물었다.
-여기 왈리 슈트라 쉼라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분의 집이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은 모르겠다며 손을 내저으며 지나갔고 세 번째 사람이 길을 가리켜주었다.
〈계속〉
▶한줄 요약
부처를 죽이려했던 문수사리 보살이 부처의 말씀에 칼을 내려놓고 장엄사리림으로 사라지고, 그 칼은 아난다에게 전해진다. 이 기자 일행은 오늘날에 검을 전해받았다는 미륵보살의 후손 왈리 슈트라 쉼라를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