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문학살롱] 18.〈승만경〉과 진덕여왕
‘신라 불국토’ 지향했던 불자 군주 신라 28대 진덕여왕 이름은 ‘승만’ 〈승만경〉 설한 승만부인과 동일시 불교 공인 후 왕실을 석가족 연결 불국토를 지향하며 신라 왕실 강화
신라 왕실의 불교 정체성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鬘)’이다. 〈승만경〉의 주인공 파사닉왕과 마리부인의 딸로 아유타국에 시집간 승만과 이름이 같다. 사촌언니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이다. 덕만은 〈열반경〉에 나오는 ‘덕만 우바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자로 태어난 보살의 이름이다. 선덕(善德)은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을 주재하는 천신 선덕 바라문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신라 27대 왕 선덕(재위 632~647)을 덕만 우바이와 동일시했다면 28대 진덕(재위 647~654)은 부처의 인가를 받아 〈승만경〉을 설한 승만과 동일시하려 한 것이다.
신라는 23대 법흥왕(재위 514~540) 때 불교를 공인한 후 철저히 신라 불국토를 지향했다. 자장이 당나라 유학 가서 문수보살로부터 선덕이 찰제리종(크샤트리아 계급)이라는 수기를 받게 되는 진종(眞宗)설이 그것이다. 곧 신라 왕족을 석가모니의 가문과 동일시한 신라 중기의 왕권 강화책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왕족이 석가모니 가문과 이름을 똑같이 쓴 것은 법흥왕의 뒤를 이은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이었다. 그는 전륜성왕의 네 바퀴(금륜, 은륜, 동륜, 철륜)에서 따와서 자식들을 금륜태자, 동륜태자로 이름 지었다.
그리하여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에 이르러서는 석가모니의 부모 이름과 같아지는 것이다. 곧 진평은 백정(白淨)이며 왕비는 마야부인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백정왕 또는 정반왕의 뜻)와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역시 석가모니 숙부의 이름이다. 그 진평의 딸이 선덕이고 그의 사촌동생이 진덕여왕(국반의 딸), 자장 율사(마야부인 조카)가 외사촌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와 같은 선덕,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은 승만의 이름이 진덕(眞德)에게 필요한 것은 신라를 불국토로 세우는 작업 때문이었다. 여기서 외사촌 자장이 황룡사 9층탑을 세워 불국토 하드웨어를 구축하고 통도사 계단을 세워 계율을 정립하는 안성맞춤의 역할을 맡았다. 진덕여왕 때에는 신라의 복식과 연호를 중국과 같게 했다. 내우외환으로 어려울수록 덕(德)으로 최상의 국가를 지향하는 진(眞)과 선(善)의 신라 불국토가 그들의 이상이었다.
승만경과 석보상절
〈승만경〉은 승만부인이 부처 앞에서 설법을 하고, 부처가 승만의 설법 내용이 옳다고 인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곧 승만과 부처는 동격이고 신라의 승만인 진덕여왕이 지향한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훈민정음 대장경 〈석보상절(釋譜詳節)〉6권에도 〈승만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사닉왕과 말리부인(석보상절 표기방식)이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에 감화를 받고 시집간 영민한 딸 승만을 불러 승만경을 설하게 되는 유래가 간략히 들어있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자세히 기록할 것은 상세히 적고 생략할 것은 간략히 만들었다는 뜻이다. 권6에는 석가모니께서 일생동안 설한 ‘반야, 방등, 법화, 열반’ 등 여러 경전이 나오는데 ‘승만경’은 상대적으로 자세히 기록한 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사닉왕과 말리 부인이 부처 뵈옵고 찬탄을 드리며 부부가 말하였다.
“우리 딸 승만이 총명하니 부처를 뵙기만 하면 마땅히 빨리 도를 깨달을 것이니 사람을 시켜 알려야 할 것이오.”
승만이 부처의 공덕을 듣고 기뻐하며 게를 지어 부처를 기리고 다음과 같이 소원하였다.
“부처께서 저를 어여삐 여기시어 제가 뵐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여래께서 홀연히 허공에 오셔서 무비신(부처의 여러 가지 모습을 갖춘 비교할 데 없는 몸이다)을 드러내시고 〈승만경〉을 설하셨다. 〈석보상절 권 6〉
그렇다면 〈승만경〉은 어떤 내용의 경전인가. 세존이 승만에게 장차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授記)하고 그녀는 성불할 때까지 절대로 깨뜨리지 않을 열 가지 서원을 세운다. 이것을 요약하여 세 가지 큰 서원을 세우고 나아가 모든 서원이 하나의 대원(大願)으로 집약된다. 곧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몸에 지니는 섭수정법(攝受正法)인데 정법은 대승이고 그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승만경’식 신라 불국토
진덕은 몸매가 풍만하고 아름다웠고 7척 장신에 팔이 무릎까지 내려온다(姿質豊麗, 長七尺, 垂手過膝)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진덕은 21세기에 태어났어도 만인의 선망을 받을 이상적인 체격을 가졌던 것 같다. 키 또한 6척이 넘는 2미터 가량의 장신이었다는데 부처의 32상 80종호에 상응하는 큰 키와 팔의 길이는 승만과 같이 재가불자 부처로 격상시키려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러한 진덕은 647년 왕으로 즉위하여 〈승만경〉의 십대서원(十大誓願)과 삼대원(三大願)에 충실한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오늘부터 보리에 이르기까지’로 시작되는 승만경의 십대서원은 다음과 같다.
① 계(戒)를 범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② 존장(尊長)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③ 사람에 대하여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④ 타인의 재산이나 지위에 대하여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⑥ 나 자신을 위해서 재산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겠나이다.
⑦ 사섭법(四攝法:布施·愛語·利行·同事)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하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지 않겠나이다,
⑧ 고독한 사람, 감금되어 있는 사람,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 재난을 당한 사람, 빈곤한 사람을 보고 그냥 버려두지 않겠나이다,
⑨ 새나 짐승을 잡아서 파는 사람, 길러서 잡는 사람, 부처의 계에 어긋난 사람을 보면 놓치지 않고 조복시키겠나이다,
⑩ 정법을 잘 지키고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을 하지 않겠나이다.
지금 바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법이다. 진덕은 신라의 승만으로 이 열가지를 모두 몸과 마음에 새기며 성장하여 그것을 정사에 옮기고자 했던 것이다.
진덕이 추구한 ‘태평가(太平歌)’
진덕은 또한 현명했다. 이 10대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면 신라와 백성을 위하여 무슨 일은 못 할까.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속에 당과 화친을 맺기 위한 정략으로 진덕은 비단을 짜고 거기에 당 고종에게 태평송을 지어 문무왕이 될 춘추의 아들 법민을 시켜 선물한다. 시 또한 잘 지어서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기리는 ‘태평가’로 고고웅혼(高古雄渾:고상하고 예스러우며 웅장하고 막힘이 없음)하다는 평을 들었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높고도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리라.// 전쟁이 끝나고 천하가 안정되니/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이어받아 은혜를 베풀고/ 만물을 다스리며 깊은 덕 간직하네.// 깊은 인(仁)은 해와 달과 짝하고/ 국운이 요순시대와 같다네.// 나부끼는 깃발은 어찌 이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웅장한가.// 나라 밖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순박한 풍속은 온 세상에 펼쳐지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일월과 오행이 만방을 돌고 있다네.// 산악의 정기는 보좌할 재상을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임명한다네.//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 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이 시를 누군가는 너무 사대적인 것이 흠이라고 하나 진덕의 염원은 ‘당나라’로 쓰고 ‘신라’로 읽는 태평가였을 것이다. 잠시 그 이름을 바꾸어 당의 지원을 얻어 백제,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 신라의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승만경〉의 ①정법의 지혜를 구하고, ②일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며, ③정법을 획득하겠다는 삼대원을 나타내는 진덕의 통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아닌 남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어디까지 해본 적이 있던가. 진덕에게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여성은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이다. 신라가 남편이고 백성을 자식으로 생각한다면 전쟁에 피폐해진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비단에 글씨를 수놓는 일쯤이야 무엇이 어려우랴. 결국 당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장차 신문왕이 될 법민에게 ‘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게 하였다. 진덕의 전략은 성공했다.
8년이라지만 7년 2개월의 짧은 왕 노릇을 한 진덕이 승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라와 백성을 위해 작은 자존심 내려놓고 큰 자존심을 지켜낸 것이라 해석할 대목이다. 그 결과 다음 왕인 김춘추가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이룰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삼국유사〉 여인의 기상이며 신라 여왕의 기본 품새인 것이다. 언니의 후광에 가려 또는 유신과 춘추의 활약으로 허수아비 왕 노릇을 했다는 편견에 가려져 있는 진덕여왕. 우리는 진덕의 면면을 사금파리 주워 그릇을 복원하는 마음으로 찬찬히 찾아내야 할 것이다.
정진원 교수는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박사를, 홍익대 대학원 국어국문과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2015년 ‘삼국유사의 한국학 콘텐츠 개발 연구’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2019년 저서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로 올해의 불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2023년 문예사조로 등단해 시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현재 튀르키예 국립에르지예스대학 한국학과 교수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