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휴 스님의 능가경 강설] 34. 망심을 진심으로, 번뇌를 보리로
34. ‘왜’라는 질문
세상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물음에서 우리는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동시에 그 질문자가 말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을 말하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우선 질문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인식시켜주어야 한다. 그 잘못된 질문이 무엇으로부터 나왔는지도 알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왜 이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모든 마음을 담기 때문에 그 질문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 존재성을 온전히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잘못된 단추를 끼우게 된다. 우리가 존재성을 알기 위해서는 사전적인 이해도 아니고, 세상을 이해하는 척도를 통해서도 아니다. 그 질문하는 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만약 질문하는 자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면 아무리 존재성에 대해 듣게 되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외부적인 것에 대해 알기 전, 우리의 질문자가 외부적인 것들에 대해 얼마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만약 외부적인 것을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지 않고, 보고 듣는 것을 자기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분별하게 되면 그는 영원히 외부적인 것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자기애에 빠져 외부적인 것을 왜곡시켜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을 아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만약 식(識)을 지혜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망심이 진심이 되며 번뇌가 보리로 변해 해탈의 경계를 알 수 있네. 해탈의 경계는 결코 소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이로부터 마땅히 알 수 있듯이 소위 변제(邊際)가 없다는 것은 결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네.”
질문의 ‘왜?’는 자신의 현 상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를 하기 위해서는 그 질문자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범위가 전체의 의미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한 질문의 목적은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시험일 것이다. 질문의 목적은 ‘나를 한번 이해시켜 봐.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재주로. 나는 당신이 나를 얼마나 잘 이해시키는지에 따라 당신을 판단하겠어.’라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어찌 그와 진실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데,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기에 내가 모르는 것을 판단하고 있는가?’ 이렇게 묻는 것이 타당할 텐데 대부분은 이렇게 묻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정말로 바로 대답할 것이다. ‘사실 나도 아는 것이 없다. 당신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안다는 것이 문제이지, 완전히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히 모른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것만 완전히 동의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도 어지럽게 사량분별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부분 이것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 틈으로 삐죽하고 사량분별하는 마음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하여야 할 것은 알려는 그 마음과 안다는 그 생각을 간파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도 그 망심을 진심으로 만들게 되고 번뇌를 보리로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론가 구하고 향해버린 이들은 찾아야 하는 조급한 마음과 알아야 하는 다급한 마음으로 인해서 중요한 핵심을 항상 놓치게 된다. 분별이 망심이고 변하는 것을 고정하려는 마음이 번뇌인 줄 모르고, 진심과 보리가 달리 있는 줄 알고 찾게 된다. 진심과 보리는 따로 없다. 분별이 사라지면 그 자리가 바로 진심이 되고, 변하는 것을 변하는 것으로 알아서 잡는 것도 없고 놓는 것도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보리가 된다. 이러한 진심과 보리를 알았다고 자신이 무엇이 되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탈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달리 해탈을 향해 배를 띄워 항해하지 않는 즐거움을 향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