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휴 스님의 능가경 강설] 33. 진리의 등대는 꺼지지 않는다
33. 삼세제불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은 시대가 변하더라도 수행자들의 뇌리에 맴도는 화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구하는 이는 많지 않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 질문에 왜 허둥대며 움직이느냐이다. 허둥대는 것이 무엇인지만 알면 자신이 무엇인지에 거의 가까이 닿게 된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지만 아마 대부분은 놓치는 부분일 것이다. 몸과 마음은 어떤 일을 추진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진하는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되돌아보기 어렵다. 만약 되돌아본다면 추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은 목적지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바르게 하다 보면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알아야 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이 되돌아봄이 아주 짧아져 찰나에 간파된다면 왜 되돌아보라고 그렇게 강조했는지 의문이 풀린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을 알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은 일부분의 이름이지 전체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일부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전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이라는 이름의 일부와 부처라는 이름의 일부를 알고 있으니 다르게 보였던 것이지 이름이 없는 전체를 알고 보니 이 두 가지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보고 들은 언어와 소리는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그러니 마음에 알고 있다는 분별심이 나타날 수가 없다. 그 알고 있다는 마음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타나는 모든 것에 분명한 앎이 생겨난다. 간택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봄은 일체를 그대로 본다. 그대로 본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라 하게 되면 알지 못하는 이에게는 등대가 없어지는 것과 같아 헤매게 된다. 그 등대의 이름을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다. 등대를 의지해 배가 정박하고 나면 그곳에 정박한 모든 배들은 똑같다. 배가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이름과 모양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렇게 보이고 이름 붙여진 것은 그것의 이름이 아니다.
“범부들은 생명이 오래 지속되기를 희망하기에 외도들이 삿된 견해로 그들의 망상을 증가시켰네. 그래서 생사의 떠돌아다님이 끝없이 돌고 돈다고 했네. 지금은 그들로 하여금 생사를 벗어나 해탈을 얻고 노력하고 정진해서 진제를 증득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말하기를, 제불은 아주 쉽게 볼 수 있어 결코 우담바라처럼 그렇게 보기가 어렵지 않다고 한 것이네.”
이름과 모양이 그 본질을 덮고 있지만 우리는 그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고 이름과 모양에만 정신이 쏠려있다. 이름과 모양이 수승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남의 부러움은 살 수 있어도 자신의 본 모습을 알아야 하는 사명은 해결하지 못한다. 이름과 모양의 장애를 뛰어넘어 자신의 본 모습을 알아야만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가 있다. 윤회의 고리를 끊는다고 해서 특별하ㅁ고 사실적으로 일어나 달라지고 나타나는 것은 없다. 아주 평범하고, 수행을 하기 전과 다르지 않고, 삶을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도 없으며, 남에게 신묘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고, 일반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사실을 사실로 알고,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분명하게 알기에, 살아온 시간도 없고 살아야 할 시간도 없으니, 두려움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오직 길을 잃은 배들이 불빛을 보고 찾아드는 등대로서 살아간다. 등대는 머무는 곳이 아니고 지나가는 곳이다. 찾아든 배들을 등대에 정박시키지는 않는다. 정박시킬 수 있는 선착장이 없다. 그들도 안전하게 항해를 마치면 하나의 등대가 된다. 어두운 밤의 가운데서 깜빡깜빡 불을 밝힐 것이다. 그 불빛은 또 다른 인연의 등대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봉화대가 불을 피워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진리의 불빛도 곳곳에서 나타나 어둠을 밝힌다. 따로 중생이 있고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양과 소리에 물들지 않은 모든 이들이 등대인 것이다. 그러니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삼세의 부처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