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남 장편소설 아디카야의 검] 30. 뉴델리 가는 길, 검문을 받다

30. 스리나가르여, 스리나가르여 3

2023-08-18     백금남

시종들이 달려들어 억지로 입을 벌리고 술을 들이부었다. 스님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자 여왕은 스님을 농락하려 하였다. 하지만 스님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자 여왕은 스님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소.

-사랑하는 사람?

되뇌던 여왕이 허공으로 얼굴을 쳐들고 까르르 웃었다.

-아니 사문이 여자를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냐?

-아내요. 아내와 자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소. 내가 깨달음을 얻어 돌아가야 하오.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러니 놔 주시오. 그대도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다. 남자란 주인이 없는 것이다. 가지면 그 사람이 임자다.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남자요, 씨를 뿌리면 그만인 것이 남자다.

-그래서 여기서는 남자들이 그런 대우를 받고 있구려?

-그렇다. 네놈의 코를 꿰어야 하겠구나.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나라가 동녀국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래전 이곳의 국왕은 남자였다. 정실 외에 후실이 40명이나 되었다. 자식이 55명이나 되었을 정도였다. 정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왜냐면 왕이 후실에게 미쳐 그녀들만 찾았기 때문이었다.

정실은 뱀을 풀어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그의 후실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녀들의 아들들마저 죽였다. 여자아이들만 살려 병사로 키웠다. 동녀국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남자애가 나면 코에다 코뚜레를 끼여 소처럼 길렀다. 밤이면 남자들이 소를 타고 여자들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스님이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여왕이 아랫사람들을 불렀다. 여자들이 창과 칼을 들고 몰려왔다.

-저놈의 코를 꿰어라!

그때였다.

-물러서라!

우렁찬 음성에 시선을 들어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여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여인들이 그 앞에 하나같이 엎드렸다.

-산신이시여, 어쩐 일이십니까?

-네 이곳을 둘러본즉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사문을 능욕하지 말라. 사문은 비정(非情) 그 자체이다.

-비정이라니요?

여왕이 엎드린 채 물었다.

-사문이 비정하지 않고 어떻게 도(道)를 구하겠느냐. 부모와의 인연을 끊고 세속을 어떻게 등지겠느냐. 사문이 비정을 잃는다면 무관 지옥에 떨어지리라.

산신이 스님을 향해 합장하였다.

-선지자여, 여왕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이 나라를 지키다 신이 되어 산을 보살피고 있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그대는 붓다의 경지를 얻을 몸이니 부디 이곳을 버리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스님은 그곳을 벗어났고 산신은 비를 세웠다. 그 후 동녀국에서 사문을 능욕하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동녀국은 멸망하였다. 그때의 여왕은 살아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주하였는데 이상한 일은 비정의 비가 이곳으로 스스로 몸을 옮겨왔다. 여왕은 사문을 능욕하지 않고 나라를 잘 이끌었지만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동녀국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비석은 무너지지 않고 세월을 견디다 이제 몸을 눕히고 있었다.

오오스마 기자가 말을 끝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싶었다. 사문이 비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견성을 볼 것인가. 그렇기에 오늘도 스님들은 결가부좌하고 화두를 든다.

이게 무엇인가? 부모를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화두를 든다. 언젠가는 가족에게 돌아가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은 채.

그러나저러나 오오스마 기자도 무쿠암의 지팡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그 생각을 딴 곳으로 돌리려고 말이 많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스르르 눈이 감겼다.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었다.

펀뜩 눈을 뜨자 오오스마 기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출출하지 않습니까?

탕.

오오스마 기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일었다. 차가 키이익하고 급정거했다.

-뭐야?

자는 사람들이 놀라 일어났다. 뒤이어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르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총을 든 군인들의 얼굴이 하나 같이 검었다. 검정칠을 하고 정찰을 하다가 교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도 정부와 분리주의 간에 분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 안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이럴 수가!

군인 몇몇이 총을 겨누고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길이 뱀눈처럼 번뜩였다. 그들이 사람들을 살피는 사이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 하나 숨을 크게 쉬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 하나가 오오스마 기자 앞에서 멈추었다. 오오스마의 생김새가 눈길을 끈 것이 분명했다.

군인이 오오스마 기자에게 총을 겨누고 한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오오스마 기자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군인에게 주었다.

군인이 신분증을 받아 살펴보고는 동료에게 넘겼다. 아마도 상관 같았다. 상관이 오오스마 기자의 기자증을 살펴보다가 오오스마 기자 앞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기자야?

-그렇습니다.

오오스마 기자의 음성이 떨렸다.

-일어나.

오오스마 기자가 일어났다. 겁에 질린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나는 그를 잡지도 못하고 올려다만 보았다.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오오스마 기자가 그 눈길로부터 돌아섰다. 상관이 총부리로 앞장서라는 듯이 오오스마 기자에게 휘둘렀다. 오오스마 기자가 앞장서서 차에서 내렸다 군인들이 그제야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송 서화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도 내려야 할 것 같아요.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던 송 서화가가 시선을 들었다.

-기다려 보지요. 분리 무장 단체가 아니고 정부군인 것 같으니까. 잘못되면 우리까지 불똥이 틸 수 있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송 서화가의 말이 맞았다.

잠시 후 오오스마 기자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괜찮아요?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오스마 기자가 피식 웃었다.

-취재하다 보면 한 번씩 있는 일입니다. 무장 단체가 아니라 다행이었어요. 우리 신문사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니 계속 잘 써달라고.

-어휴 십 년 감수했네.

송 서화가가 그제야 오오스마 기자를 툭 치며 말했다. 비로소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래도 긴장이 물러가지 않는데 어느 한순간 내 곁에 앉았던 오오스마 기자가 입을 열었다.

-스리나가르(Srinagar)는 엄밀히 인도 최서북부에 위치한 잠무·카슈미르(Jammu & Kashmir) 지역입니다. 인도 내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분쟁이 심해요. 1900년부터 카슈미르의 독립이나 파키스탄의 편입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반군이 활동하며 정부군을 괴롭히니까요. 무려 그 단체가 10여 개나 됩니다. 그들과 인도 정부와의 교전으로 지금까지 7만 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하니까요.

-듣긴 했지만, 그것도 모르고….

겁 없이 들어왔다는 내 말에 오오스마 기자가 빙그레 웃었다.

-참 이상해요.

-뭐가요?

-이렇게 위험한데 한국 사람들 도대체 겁이 없어요. 이곳을 여행자제 지역으로 선정했는데도 한국인 배낭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거든요. 북부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주 마날리(Manali)에서 스리나가르로 향하는 한국인 배낭여행 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어요. 위험지역이라고 말리는데도 그래서 간다는 식이에요. 주로 마날리에서 레(Leh)를 거쳐 스리나가르로 가는 루트를 선호하는데 정말 겁이 없어요. 우리도 몇 번 다루었어요. 현지 언론도 그렇고요. 거의 매일같이 스리나가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와 총격 사건을 뉴스로 내보내고 있는데도 나 몰라라 에요. 지난달에도 레이크(Dal Lake·호수) 인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3명이 죽었어요. 지난해에는 이슬람 분리주의 무장 단체 히즈불 무자히딘의 젊은 지휘관 부르한 와니(Burhan Wani)가 정부군인 인도 치안 당국의 공격을 받아 죽었지요. 그러자 항의 시위가 두 달간 이어졌어요. 시위대 수십 명과 경찰들이 사망했는데도 여행객들은 넘쳐나요. 방금은 정부군이어서 다행이지 분리주의 무장 단체였다면 모두 끌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난처했을 겁니다.

무식하면 겁이 없다더니 이런 곳을 겁도 없이 활개 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오스마 기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동행했을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목숨을 내놓고 이번 일에 임했다는 말인데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으면 나는 애초에 어땠을까 싶었다.

-나는 출가해서 스님이 될 팔자는 못 되는가 봅니다. 끌려갈 때 그 사람 생각이 나더군요. 아, 이렇게 헤어지는 것인가?

그 사람이라면 아내를 말하는 것인가?

-총각인 줄 알았는데 결혼하셨군요?

내가 물었다.

오오스마 기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약혼만 했어요. 같은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어쩌다 정이 들었어요. 참 생각해 보면 기가 막혀요. 어떻게 그런 사람과 헤어질 수 있겠어요. 날 길러준 사람들과 어떻게 헤어질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사문은 헤어져야만 하니….

나는 스쳐 지나가버린 비정의 비를 바라보았다. 이미 비정의 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설산을 헤매고 벌판을 헤맸을 사문의 모습이 눈앞에 어룽거렸다.〈계속〉

▶한줄 요약
이 기자 일행은 뉴델리로 가는 도중에 군인들의 검문을 받는다.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일행은 군인들이 반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지만 다행히 오오스마 기자가 다니는 신문사에 우호적인 정부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