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37.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삶

37. 정용숙의 ‘한 뼘의 희망’

2023-08-11     승한 스님(불교문학연구소장)

한 뼘의 희망 / 정용숙

경주 불국사 말이지 뒤꼍에 대숲이 있고, 검고 허름한 집 한 채가 있는데 뒤란으로 돌아가면 무수히도 많은 돌무덤이 있어, 큰 것이야 고작 한 뼘 반쯤, 작은 것은 새끼손가락만할까

고 고만고만한 것들이 짊어진 희망은 크기가 다 같아

누가 뒤란을 돌다 무심히 던져 놓은 돌멩이가 먼저 것에 가 앉았을 게야
그것은 자꾸만 쌓이면서 돌탑이 되고, 바라는 게 많았던 눈에 돌부처로 보였던 게지
이제는 단순히 돌무더기가 아닌 한 구 한 구 부처로 서서 다시 찾은 나를 지켜보고,
눅눅하고 어둔 뒤란에서 어깨 가득 가난한 자들이 자꾸 져 나르는 희망을 넙죽넙죽
받아 짊어지고 서 있었던 게지

앞뜰은 하얀 불국사가 있고, 뒤란에서는 돌무덤인 거지
불국사는 덩치만큼 거대한 역사를 짊어졌어,
한 역사를 짊어지는 게 제 몫은 아니었다는 거야
돌부처도 마찬가지겠지,
대대손손 다만 사람의 희망을 짊어진 손톱만한 돌들의 집념, 짐작만 할 뿐인 거야

어렴풋 혈관 곳곳에 엉겨 붙어 내내 떨어져 나가지 않던 기억 속에서
나도 고만고만한 돌멩이 한 개인 거지
내 어미가 네 어미 위에 올린 고 고만고만한 돌멩이 하나

-정용숙 시집, <스쳐 지나가는 것들>, 문학의전당, 2006

“나도 고만고만한 돌멩이 한 개인” 것을 시인은 몇 년 만에 깨달았을까. ‘고만고만한 희망 한 개’인 것을 얼마 만에 깨달았을까. 1년, 2년, 3년, 4, 5, 6, 10년. “고작해야 한 뼘 반쯤” 되는 돌무덤부터 “새끼손가락만”한 돌무덤이 모여 이룬, 그리하여 지금 한 구 한 구의 부처로 서 계시는 돌무덤들을 보며 시인은 “고만고만한” 우리네 중생들이 “짊어진 희망은 크기가 다 같아”라고 선언해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선언의 당위성과 보편성을 차근차근 진술(묘사)해나가고 있는 것이 이 시다. 전형적인 선경후정(先京後情)의 서정시다.

그런데 그 후정을 풀어나가는 시인의 솜씨가 일품이다. 우선 돌무덤의 시작을 알린다, “누가 뒤란을 돌다 무심히 던져 놓은 돌멩이가 먼저 것에 가 앉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이 “자꾸만 쌓이면서 돌탑이 되고, 바라는 게 많았던 눈에 돌부처로 보였던 게”라고. 그리하여 “이제는 단순히 돌무더기가 아닌 한 구 한 구 부처”가 되어 서 계시는데, “다시 찾은 나”의 돌멩이는 물론, ‘진자리’(“눅눅하고 어둔 뒤란”)에서 “어깨 가득 가난한 자들이 자꾸 져 나르는 희망을 넙죽넙죽” 오늘도 묵묵히 “받아 짊어지고 서 있”는 돌무덤 부처님의 모습에서 시인은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손톱만 한 돌들의 집념”을 포착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며 필자도 문득, 불국사 뒤꼍의 대숲이 있는 “검고 허름한 집 한 채”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뒤란에 있는 “한 뼘 반쯤” 되는 돌무덤부터 “작은” “새끼손가락만”한 돌무덤 부처를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미보다 더 깊고 무서운 작은 돌무덤의 집념에 필자의 작은 삶의 돌멩이 하나도 가만히 얹어놓고 싶었다.

희망과 절망의 등가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안(詩眼)도 일품이다. 시인은 “앞뜰은 하얀 불국사가 있고”[희망], “뒤란에서는 돌무덤”[절망]이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앞뒤이며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임을 천하에 공표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 자신도 “고만고만한 돌멩이 한 개”임을 스스럼없이 밝히고 있다. 이상의 진술을 수식으로 표현하면 ‘∞=한 뼘=작은 손가락=희망=절망=돌멩이 하나=나(시인 자신)=우리들=중생들=불국사=불국사 뒤꼍 대숲이 있고, 검고 허름한 집 한 채’가 성립한다.

기실, 우리네 삶은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삶이다. 저 언덕 위에 등나무가 있고 그 등나무 아래 우물이 있는 삶이라는 뜻이다. 인간세 자체를 그렇게 구성해 놓은 이야기다. 어느 날 어떤 나그네가 정처 없이 허허벌판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들불이 나 나그네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 타들어 오고 있고, 그 앞엔 굶주린 코끼리가 나그네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나그네는 겁에 질려 죽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코끼리와 들불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다 그만 우물에 빠졌다. 하지만 빠지면서도 죽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다 우물로 뻗은 등나무 넝쿨을 잡았다. 안심도 잠시. 우물 위를 바라보니 아직도 코끼리가 숨을 씩씩거리며 있다. 또한 나그네가 매달려 있는 사방에는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나그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고, 우물 바닥에는 세 마리의 독룡(毒龍)이 시뻘건 입을 벌린 채 위에서 내려오는 먹이를 잡아먹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그네는 올라가면 코끼리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려가면 독룡에게 잡아먹힐 것이며 가만히 있어도 독사들이 몸을 해칠 것이다. 나그네가 처한 상황은 여기에서 그친 게 아니다. 우물에 떨어질 때 허겁지겁 잡은 등나무 넝쿨을 가만히 보니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면서 갉아 먹고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있는데 이마 위로 등나무 가지에 있는 꿀벌 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배고픈 나그네는 그 꿀을 받아먹는데 정신이 팔려 우물 위의 코끼리도 우물 아래 독룡도 사방의 독사도 검은 쥐와 흰 쥐도 잊어버리고 꿀을 받아먹는 재미에 모든 것을 잊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세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인간세를 살아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바로 정용숙 시인의 말처럼 우리 각자가 다 각각 제 몫만큼의 “한 뼘의 희망”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어디 한 곳 편하게 발 디디고 설 장소가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우리 내면에 돌무덤(돌탑, 돌부처)을 이루고 있는 “손톱만 한 돌들의 집념”을 무한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불국사 뒤꼍 대숲이 있고, 검고 허름한 집 한 채로 세 들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