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문학살롱] 15. 경허 스님의 무애행

경허 스님 무애행, ‘대자비심’의 발로 매제 전봉준 시신 수습한 경허 스님 일제가 승려 도성 출입 허하자 분노 “경성 땅 밟지 않겠다”며 삼수갑산行 大覺 후 아이에게 막대 주며 “때려라”  민초 아픔 대신한 고통의 역설 아닐까

2023-07-31     임길순 작가

요즘 생활에 여러 가지로 여유가 있으시고 두루 평안하시온지요. 삼가 그리워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저는 예전 같이 지내고 있어 별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집의 동생 혼사의 연길(혼사 날짜)을 드리오니, 신랑의 옷 치수를 적어 주시길 삼가 바랍니다. 예를 갖추지 못하고 줄이니 헤아려 주십시오. 혼사 택일은 29일입니다. 사문 경허 재배.
伏維際玆靜履起居 候萬裕伏溯 區區無任之至記下故依, 昔將餘何足煩 舍帝家親事 涓吉仰呈 衣製錄視, 伏望耳 不備伏惟 念九日 沙門 鏡虛 再拜(경허연구소 홍현지 박사 제공)

 
경허(鏡虛, 本名 宋東郁, 1849~1912) 스님이 녹두장군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에게 보낸 서찰이다. 스님의 부친 송두옥은 전북 완주군 봉상면 구미리에, 전창혁은 완주군 우동면 구암리에서 가까이 살아 친분이 있었다. 경허 스님은 여동생의 혼인을 위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혼주가 됐다. 여동생과 전봉준의 혼사를 앞두고 스님은 신랑 아버지에게 신랑의 옷 치수를 묻고 택일을 알리는 편지였다.

마이산 금당사에도 경허와 전봉준의 흔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 금당사 주지 김대완 스님은 유림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였다. 김대완 스님과 경허 스님은 잘 아는 사이였다. 전봉준과 처남 매제 사이가 된 경허는 동학운동을 준비하는 전봉준에게 자연스레 용기를 주었다. 동학군의 첫 기병 장소를 알려준 이도 경허였다는 내용이 그가 보낸 편지에 남아 있다. 

경허 스님의 여동생인 전봉준의 부인은 27세에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후 별세했다. 갓난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 씨 성을 가진 여인이 아이들을 돌보다가 자연스레 전봉준의 아내가 되었다. 이 씨 부인과도 두 아들을 두었다.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자 역적의 집안으로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여동생의 딸 전옥련을 금산사에 숨겼다. 그것도 불안하여 친분이 깊은 진안 금당사 주지 김대완 스님에게 당부했다. 전옥련은 스님의 보살핌으로 성을 김 씨로 바꾸고 8년간 금당사에서 숨어지내다가 옆 동네의 남자와 혼인을 한다. 이때 스님은 전옥련을 보기 위해 금당사를 찾았는데 금당사 고금당 나옹굴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가 몇 편 전한다. 그중 하나가 ‘화엄해중(華嚴海中)’이다. 시에서 지인은 경허 자신이라고 한다.

“장차 지인을 숨기기 위해(將爲至人隱)청산은 깊고도 깊었는데(靑山深復深)/복사꽃 도리어 아무일 없이(桃杏還無事)/옛 부처 붉은 마음 토해 내더라(吐紅古佛心)”

전봉준은 1895년(고종 32년) 3월 29일 지금의 종각역 부근에서 처형당했다. 그날은 150여 동안 금지되었던 승려의 도성 출입을 허용하는 입성해금(入城解禁)된 날이기도 했다. 역적에게 누구라도 도움을 주었다가는 삼대가 멸할 지경이니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전봉준의 처형당한 육신을 수습한 이는 경허 스님이었다.

일본 일련종(日蓮宗)은 종교침략의 한 방법으로 도성 출입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를 감파(勘破)한 경허 스님은 “나에게 서원(誓願)이 있으니 발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며 조선의 스님들을 경책(警責)했다. 스님은 이것을 끝으로 승복을 조계사에 벗어 놓고 삼수갑산으로 떠나 은둔했다. 만약 그가 숨지 않고 혹시라도 전봉준과 처남, 매제 사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인연이 닿았던 이들이 당했을 고초는 어떠하였겠는가. 

지방 권력자들의 수탈은 백성들에게만 국한됐던 것이 아니라 사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반들은 사찰 소유의 토지를 빼앗을 목적으로 백지 편지를 봉안해서 주지에게 보낸 후에 스님을 고문하여 백지가 차용증이라는 억지 자백을 받아냈다. 그래서 사찰의 주지들은 수탈자에게 백지 편지를 받으면 그날로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다. 어지러운 나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은 승과 속이 따로 없었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연합하여 우금치 전투를 벌일 때 십만여 명이 넘는 민중들이 결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아우성이었다. 

나라 밖 정치는 외세의 야욕과 개항의 요구가 거셌던 격변의 시대였다. 이러한 외세를 읽지 못하고 조선의 왕은 동학농민 운동을 저지하려 외세를 끌어들였다. 결국 외세들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을 통해 조선 백성들의 땅에서 패권 싸움을 벌이게 된다. 울분에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전봉준과 백성이었다.

나라가 난세인데 그가 민중을 돌보지 않고 기행으로 일관했다고 여겼다. 이번에 경허 스님의 걸림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의 궁금증이 실타래처럼 풀렸다. 동학사에서 대강백이라 명성이 자자했던 경허가 청계산 청계사에 머무는 스승 계허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천안쯤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 몸을 의지했던 처마에서 전염병으로 마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자신에게 분노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화두를 참구(參究)했다.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있던 경허 스님이었다. 이때 시중을 들던 동은 행자는 마을에 사는 이 진사의 아들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몰락한 양반들이 지방으로 많이 내려와 있었다. 이 진사도 그런 몰락한 양반의 집안이었다. 아들에게 유가의 학문보다 불문에 들여 행자 수업을 시켰다. 어린 행자의 눈에 경허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와 같았다. 

하루는 동학사 스님들이 탁발하러 가게 되었다. 이 진사의 아들 동은도 대중스님들과 마을로 가게 돼 그리운 아버지의 집에 들렀다. 함께 탁발하던 학명 스님과 이 진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저녁 한때를 보내던 중이었다. 이 진사가 중노릇 잘못하면 죽어서 소가 된다는 말에 학명 스님은 어찌하면 소가 되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죽어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다. 그 뜻을 알 수 없었던 학명은 경허 스님을 모시는 천진한 행자 동은에게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의 뜻을 경허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동은이 경허에게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소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허 스님은 활연대오(豁然大悟), 물아(物我)가 공(空)한 도리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육신을 초탈하여 어떠한 일에도 걸리지 않는 대자유를 깨달았다. 경허 스님은 이 순간을 오도송으로 읊었다.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忽聞人語無鼻孔)/ 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내 집이로구나(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六月?巖山下路)/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

이렇게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 된 경허 스님이 한번은 자신을 지게 작대기로 아프게 때리면 엿을 사주겠다면서 아이들에게 작대기를 줬다. 개구쟁이들은 의아스럽긴 했지만, 엿을 사 준다는 말에 스님을 작대기로 마구 때렸다. 경허는 그때마다 맞지 않았다고 외쳤다. 경허의 가슴에 무어 그리 커다란 설움이 있어서 사정없는 작대기의 타작도 아프지 않았던 것일까. 매를 맞은 것은 누구였을까. 이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인 된 스님의 청정한 진아(眞我)가 아니라 무상한 몸뚱일 뿐이라는 가아(假我)의 선언이 아니었을까. 스님의 외침은 백성들은 저리 아픈데 그 아픔을 대신한 고통의 역설이 아니었을지. 

오늘은 내가 많이 아프다. 경허 스님의 무애행을 제대로 감파(勘破)하지 못한 내가 울고 싶다.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인데 그가 깨달은 선지식이 무슨 소용 있었을까. 백성이 어린아이처럼 길가에 버려진다면 경허 스님과 전봉준이 바라던 ‘태평가’는 허망한 그림자일 뿐일 것이다. 깨달음이란 것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성을 잃었고 그의 매제인 전봉준을 잃었다. 그러한 이별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달래려 아이들에게 작대기를 쥐여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경허의 무애행은 대자비심이었다. 

나라가 수탈자로 변한 관리들로 멍들어 갈 때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기행을 한 그가 품은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허 스님은 스러져가는 20세기 간화선의 선풍(禪風)을 다시 일으켰다. 경허 스님의 법맥을 이은 제자 중에 삼월이라 일컫는 수월, 혜월, 만공(월면)은 삼수갑산으로 떠난 스승을 그리워했다. 수월은 갑산군 도하리에서 박난주로 살며 훈장 노릇을 하던 경허를 찾았다. 문밖에서 애타게 불렀지만, 스승은 만나주지 않았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짚신 몇 켤레를 정성껏 삼아 댓돌 위에 올리고 돌아섰다. 

수월은 스승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서 머물다가 스승의 열반을 만공에게 알린다. 그리고 경허 스님이 무애행을 한 것처럼 백두산 기슭 도문시 회막동에서 소먹이는 농부로 살았다. 받은 품삯으로 만든 짚신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고 주먹밥을 만들어 길가 바위 위에 쌓아놓았다. 간도로 건너오는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을 위한 무애행이었다. 

수월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까지 사람들은 도인인 줄 몰랐다고 한다. 수월은 1915년 회막동을 떠나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에서 여전히 민중들을 위해 살았다. 그때 금오, 효봉, 청담 등 많은 나라 잃은 스님들이 수월을 찾았다. 나라의 일이 경허의 일이었고, 전봉준의 일이었으며, 수월, 혜월, 만공, 한암의 일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의 일이었다.

일 년이 지나서(1913년 4월25일)경허의 열반 소식을 듣게 된 혜월과 만공은 갑산으로 가서 김탁을 찾았다. 그에게서 그동안 서당의 훈장으로 마을 사람들과 걸림 없이 살다간 경허 스님의 행적을 듣는다. 봉분을 찾았으나 이미 시신은 백골이 되었다. 애제자 만공이 이별할 때 손수 만들어 주었던 쌈지와 담뱃대가 있어 경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제자는 다비식을 하고 스승의 마지막 남은 흔적을 김소월의 ‘삼수갑산’ 시에 ‘오고가니 기험(崎險)타 아하 물도 많고 산첩첩(山疊疊)이라 아하하’라고 표현한 그 산천에 뿌렸다. 

경허 스님은 열반에 들어 전봉준과 그의 여동생 그리고 우금치 전투에서 쓰러져간 혼백들을 만났을 것이다. 욕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이 땅의 순수한 백성. 저세상에서 다시 만난 그들에게 스님께서는 어떤 법문을 했을까. 

▶임길순 작가는
충북 제천 출생. 1998년 <책과인생> 등단. <한국산문> 편집부장, 한국문인협회 성동지부장 역임. 제8회 풀꽃문학상·제15회 한국산문문학상·제14회 서울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