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35. 공즉시색 색즉시공

35. 최두석의 ‘주목의 환생’

2023-07-10     승한 스님(불교문학연구소장)

주목의 환생 / 최두석

함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곁에 고사한 주목 한 그루, 비록 잎은 없어도 줄기뿐만 아니라 가지도 얼추 갖춘 모습으로 비바람 맞고 서 있었다. 원래 자장이 석가의 사리를 모셔온 뒤 꽂아둔 지팡이였다는 전설과 다시 살아난다는 예언이 오랜 세월 신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였다.

한동안 고사목은 새들의 쉼터가 되었다. 온갖 새들이 날아와 쉬다가 똥 싸고 날아가기를 되풀이하였다. 새똥은 고사목의 텅 빈 몸통을 통과하여 떨어져 쌓였고 그 똥 무더기 속에서 씨앗이 싹을 내밀었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고 나니 어엿한 주목이었다. 고사목 몸통 속에서 어린 주목은 힘껏 줄기를 밀어올리고 가지를 내밀었다. 세월이 흘러 가지는 고사목의 몸통을 뚫고 활개 치듯 벋어 나왔고 다시 세월이 흘러 줄기는 고사목의 우듬지 높이로 자랐다

이제 새 주목은 옛 고사목과 한 몸처럼 껴 앉고 있다. 산 붉은 살결이 죽은 잿빛 뼈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합장하는 불자들도 많다.

-최두석 시집, <두루미의 잠>, 문학과지성사, 2023

아,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죽어서도 ‘붉은 주먹’[주목(朱木)] 불끈 쥐고 살아서, 살아 있는 우리들을 ‘주목’(注目)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런 붉은 전설이 있었던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더니, 진짜로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살아서 우리들의 ‘과·현·미’(과거·현재·미래) 삼세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구나.

어느 겨울 날 함백산 정암사 적멸보궁에 오른 최두선 시인이 우리들에게 그 천 년의 ‘붉은’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지치고 추운 새들(중생들)의 쉼터가 되었던 ‘죽은’ “고사목”에 “온갖 새들이 날아와 쉬다가 똥 싸고 날아가기를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가 싼 똥들’이 “고사목의 텅 빈 몸통을 통과하여 떨어져 쌓였고”[공즉(空卽)], “그 똥 무더기 속에서 (또 하나의 천 년의)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워” 높이가 “고사목의 우듬지”까지 닿은 “어엿한” 새 주목으로 “자랐다”[시색(是色)]는 것이다.

바로 그 대목에 ‘죽어서 천 년, 살아서 천 년’의 주목의 비밀이 들어 있음을 최두석 시인은 이렇게 시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의 세계였던 것이다. ‘공이 공인 것’[죽음]처럼 보였지만, 그 죽음은 다시 ‘새로운 삶’[생(生)]을 아무도 몰래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어느 날 어느 책자를 읽다가 ‘타인의 죽음은 내 삶의 거울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거울이 필요했다. 자신의 죽음도 볼 수 없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죽음뿐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배우고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4000여 년 전에 쓰인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의 서사시>의 핵심 내용도 죽음이었다. (……) 그러나 과연 죽음은 극복될 수 있는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고, 다만 조금 미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 밖에 있는 타인의 죽음은 결코 타인만의 것이 아니다. 전쟁, 재난, 사고 등 슬픈 죽음이 많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나와 내 가족만이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냉정한 사회는 철학적으로 빈곤한 사회이며, 비인간적인 사회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돈을 긁어모으고, 영원히 살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보내는 삶의 경고가 타인의 죽음이다.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거울이다.”

다소 긴 인용이 됐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최두석 시인의 이 시가 더욱 엄중하게 다가왔다. 특히 “원래 자장이 석가의 사리를 모셔온 뒤 꽂아둔 지팡이였다는 전설과 다시 살아난다는 예언이 오랜 세월 신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였다.”는 시구는 길가메쉬가 친구인 엔키두와 함께 신의 명령을 어기고 ‘명성’을 얻기 위해, 혹은 자신의 몸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두려움’-인간은 필멸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험을 강행하는 모습과 겹쳐지면서 인간의 유한성과 우주(불교, 부처)의 위대성을 함께 총섭하게 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자. 죽은 고사목처럼 보였지만 주목은 사실 죽은 것이 아니다. 새 삶의 시작하기 위해 몸뚱어리(몸통)를 잠시 ‘비웠을 뿐’[공(空)]을 뿐이다. 다만, 어리석은 인간들만 고사목이 죽었는데 부처님의 자비로 ‘다시 살아난다’[윤회(輪回)]는 믿음을 믿고 길가메쉬 같은 두려움에 합장을 올리며 예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은 절대로 죽지 않는 비 윤회의 나무다. 천 년 동안 살면서 몸을 비워내면 또 새똥에서 새 씨앗이 나와 천 년을 다시 시작하고, 그 몸이 또 텅 비워지면 어린 주목이 다시 태어나 우듬지 높이로 자라 우리들의 삶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주목(注目)]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최두석 시인은 그 모습을 보고 “이제 새 주목은 옛 고사목과 한 몸처럼 껴앉고 있다. 산 붉은 살결이 죽은 잿빛 뼈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합장하는 불자들도 많다.”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놀라울 만큼 진실하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주목나무의 비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런데 자장 율사는 왜 하필 부처님의 지팡이를 가져와 이곳 함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옆 높은 곳에 꽂아두었을까? 그것은 세상의 고(苦)를 그렇게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닐까. 부처님께서 평소 짚고 다니신 지팡이라면 보통 성물(聖物)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기꺼이 주신 지팡이를 자장 율사는 왜 높고도 높은 황지의 진산(鎭山)인 이곳 정암사 적멸보궁 옆에 꽃아 놓고 불자(정암사 신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였”을까? 물론 그것은 ‘시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해발 1573m 높이에 있는 함백산에 오르는 동안 속세의 모든 번뇌망상과 탐진치 삼독심을 거기다 완전히 다 벗어놓으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도 부처님 최고의 성물인 지팡이를 꽂아놓고 말이다.

죽은 듯 보였던 고사목은 “이제 새 주목”이 되어 “옛 고사목과 한 몸처럼 껴 앉고 있다.” 그리고 해발 1573m를 올라오느라 받은 숨을 컥컥 내뱉는 불자들에게 “산 붉은 살결이 죽은 잿빛 뼈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합장하는” 많은 “불자들”을 ‘두 눈 부릅뜨고’[주목(注目)] ‘산 붉은 살결’[주목(朱木)]로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