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스님의  제주 산방일기] 영천사지와 예기소

2023-07-03     현불뉴스

비가 참 많이도 오는 장마다. 이때가 되면 제주는 더욱 아름다운 섬이 된다. 건천으로 말라 있던 하천들이 한라산 정상으로부터 물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줄기, 돈내코 원앙폭포로부터 바다로 흘러 쇠소깍에 이르는 효돈천의 풍광은 더욱 그럴싸하다.

효돈천의 옛 이름은 영천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를 보면 ‘영천천(靈泉川)’으로 돼 있는데, 조선 말기 〈조선지형도〉에는 ‘효돈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천천의 이름은 사찰명에 유래해서 불리다가 조선 중후기 불교의 흔적을 지우는 일환으로 그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영천사 터는 영천오름 서쪽의 효돈천과 인접한 하천 대지상에 자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의 정의현 불우조에는 ‘영천사는 천 동쪽 언덕에 있는데, 영천관과 동서로 서로 마주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제주목사 김흠조에 의해 1525년(중종 20)에는 정의현성을 옮길 후보지로 영천관 일대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천사 주변은 당시 제주의 동남쪽 지역을 관리하는 정의현의 행정관할에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와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여비고〉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영천사가 언제 폐사됐는지 알 수 없다. 

영천사지 서쪽 둔덕 바위에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나암(觀儺岩)’이라는 마애명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영천사에서 행해지던 불교의식인 나례(儺禮)를 구경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나례는 승려들이 주도해 섣달그믐날 가면을 쓰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춤을 춰서 잡귀를 몰아내던 의식이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점차 나례에서 역병을 구하는 의식보다 놀이의 잡희부가 확대되면서, 나례가 나희(儺戱)로 변모되었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을 보면, 세조 12년 1466년 절제사 이유의가 절 맞은편에 영천관을 짓고 마필을 점검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점마사(點馬司)들이 오면 국마로서 많은 말이 뽑히게 하려고 기생이나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환대하였다. 이는 영천동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런 일정이었다. 영천사지에서 조금 내려가면 가락산과 영천악 사이에 절벽이 있는 좁은 냇목이 있다. 관리들은 이 절벽에 외나무다리나 밧줄을 메어 그 위에서 아슬아슬 춤을 추게 하여 흥을 돋우며 즐기곤 했다. 이와 관련된 ‘예기소(藝妓沼)’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 온다. 

어느 날 애향이라는 기녀와 일행들이 불려와 기예를 하다가, 애향이 그만 깊은 계곡에 떨어져 죽었다. 그 한으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장대비가 사흘 밤낮을 퍼부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진혼제를 지내고 극락왕생을 빌어주며 그 시신을 영천악 남측기슭에 묻어주니, 비로소 비가 그쳤다. 그 후로 애향이 떨어진 자리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沼)가 생겼고, 그녀의 기일에는 느닷없이 비가 오고 돌풍이 이는 일이 많았다. 그 후로 관리들의 향연인 나희는 금지됐고, 사람들은 여길 ‘예기소’라고 불렀다.

영천천의 사연이 세월에 건천이 되어도/ 달빛 한줄기 바람결에 내려오면 님들의 넋들은 비무(悲舞)를 시작하고/ 영천오름 꾀꼬리의 긴 울음, 그날의 한(恨) 바위에 새기던 스님의 징 소리라네/ 그대 잊지 않기를, 하염없는 장맛비가 영천을 따라 굽이쳐 흐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