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문학살롱] 11. 선·악 不二와 無心-정의에 대한 생각 

선악이란 이분법서 벗어나라    칸트, “양심은 선험적이고 보편적” 주장 에고 발동하면 양심이란 선도 독선 변화 육조 혜능 선사 설했던 ‘불사악 불사선’  본래면목 자각하면 선악 초월해 자유롭다 

2023-06-13     맹난자 수필가
육조 혜능 진영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옳은가
“정의(正義)란 결코 단순하게 정의(定意)할 수 없다”고 미셀 푸코는 말했다.

하버드 법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도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답은 밝히지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실토한 바 있다. 이 책의 원제도 〈정의: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Justice:What’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그는 정의에 대한 상반된 여러 상황을 제시하며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숙고하게 한다. 

예를 들면 영국이나 미국에서 대리모를 구할 때, 가격이 덜 비싼 인도에서 대리모를 구해 온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아이를 갖는 것이 옳지 않다고,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한편으로는 아이를 얻은 부모는 행복해하고 대리모는 받은 돈으로 집도 사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며 안락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정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2020년 그는 〈공정하다는 착각〉을 써내 다시 한번 정의에 대한 돌풍을 일으켰다. 푸코의 말대로 정의란 ‘임의적’이어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권력을 휘두르며 아전인수로 자기네들의 의견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맞선 사람들 또한 자기네 의견이 정의라고 뜻을 굽히지 않는다.

실재하지도 않은 이념의 도그마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아왔다.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사화(士禍), 자신은 물론이요 심지어 삼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러나 임금이 바뀌면 불의한 자는 다시 정의한 자가 되어 정계에 복귀하고 실권자(失權者)들은 불의한 자가 되어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는다. 

옳고 그름, 시비(是非)의 속내에는 사적(私的) 이익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심은 善에 속는다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인간은 인간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이상’이 인간의 본질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고 또 그것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선험형식’을 내세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그 주체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오온으로 설명한다. 몸과 마음과정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의 관계로 인식론을 통찰하자면 사물→눈→인상→표상작용, 여기까지를 칸트는 순수이성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상想’의 복합관념이 붙기 이전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상想’이란 마음이 모양〔相〕을 만들어낸 복합관념이다. 눈→인상→표상은 보는 그대로가 왜곡현상 없이 ‘나’이다. 자아관념의 필터로 굴절시킨 망상妄想에 물들지 않은 그 ‘선험先驗’을 칸트는 순수이성이라고 하였다. 선험형식은 누구에게나 있고 인간은 경험 이전에 대상을 인지하는 틀을 선험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뤘다. 칸트는 실천이성의 본질을 자유로 보고 실천이성의 형식을 도덕으로 보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내 머리 위의 별빛 찬란한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 있다”고 외쳤다. 그는 ‘도덕률’을 실천이성의 정언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도덕 근본주의자로서 그의 자유가 도덕 원칙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의 양심을 얼마나 들여다 봐야했을까? 

칸트는 자신이 말한 양심이란 선험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양심을 양심이라고 하면 이미 바른 양심이 아닌 것이 된다. 자신은 이성적이고도 양심적으로 절대 선(善)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에고가 발동하는 순간 그것은 ‘독선(獨善)’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주의는 자칫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만다. 양심은 무엇보다 에고에 물들기 때문이다. 칸트는 ‘양심’을 선험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오염되는 3차원의 세계였다.

모든 善은 惡을 회임하고 있다
심성론(心性論)에서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고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사람의 성품이 본디 착함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고 맹자는 ‘사단설(四端說)’에서 악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의(義)의 단초라고 보았다. 의(義)가 격퇴해야 할 대상은 그러니까 악(惡)이다.

유가(儒家)의 선악관은 선(善)을 선택해서 그것을 고집하는 ‘택선이고집(擇善而固執)’이다. 그러나 도가의 노자는 인(仁)을 잃은 뒤에 의(義)가 있고, 의를 잃은 뒤에 예(禮)가 있는 것이라며 “도는 늘 함이 없되, 하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 而無不爲, 〈도덕경〉 제37장)”고 무위(無爲)를 주창했다. 도에서 가장 멀어진 상태가 예(禮)라며 상덕(上德)은 도의 근원에 가까우니 무위(無爲)로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위의 정치는 손·익(損益), 선·악의 대결에서 벗어나 마음이 허공처럼 자연과 회통하게 되면 세상은 자연처럼 스스로 다스려진다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언급했다. 노자는 악을 선의 적이나 투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악은 선善의 바깥에 서 있는 이물질이 아니라 선善이 분비한 또 다른 모습이므로(善惡不二) 그것을 없애기보다는 마음을 무아(無我)로 바꾸라고 충고한다. 모든 선(善)은 악을 회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엄격한 자기 검열을 통해 회심(回心)한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칭찬에 대한 유혹이 왜 죄인가’를 성찰하면서 “칭찬의 유혹을 거부할 때조차 그 또한 유혹입니다. 왜냐하면 유혹을 거부하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나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선행(善行)조차도 자칫 위선이 될 수 있음을 실토한 것이다. 선행 속에 감춰진 자기 위선을 그는 〈고백록〉에서 냉엄하게 이렇게 마주한다.

不思善 不思惡하라
양심은 더러움(에고)에 물들기에 경험의 차원에 속한다. 선험(先驗)은 악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자리이다. 중국의 선사 6조 혜능이 어느 날 남악회양에게 그것을 물었다.

“가히 닦아서(마음) 증득할 수 있는 것인가?”
“닦아 증득함이 없지는 않사오나 물들지 않습니다.”
“물들지 않는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께서 애써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대도 그렇고 나 또한 그러하다.”
그 자리에서 남악은 혜능의 인가를 받아 그의 법을 이었다.

선험은 항상 있으면서(如如)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경험이 작용(用)이라면 선험은 본체(體)라고 할 수 있다. 선험(體)은 온갖 경험(用)이 일어나는 바탕으로 하나는 마음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조(馬祖)대사의 가르침 또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한 것, 일부러 닦아 깨끗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대의 심성(心性), 그것은 본래부터 부처였으므로 다른 데서 부처를 구하지 말라. 마조대사는 본래 청정한 그 ‘마음이 바로 부처(卽心卽佛)’라고 설파하였다. 본래성불을 깨닫고 나면 옳고 그름의 시비도 사라진다. 내가 진리라고 혹은 정의라고 믿었던 것들은 업습(業習)에 따라, 즉 인연에 반응한 자아관념의 굴절인 것이다. 그때 떠오른 것이 혜능 선사의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었다. 

6조 혜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장사를 하던 중, 어느 객승의 독송을 듣다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마음이 열리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황매산 5조 홍인의 법을 전수받아 의발을 가지고 떠날 때였다. 홍인은 “신표로서 전한 의발은 네 대에 그치고 더 전하지 말라. 유형의 물건 때문에 법난쟁탈이 벌어질까 두렵다”고 말하며 그를 이 밤으로 대중의 눈을 피해 남쪽으로 떠나가게 했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대중들은 그를 추적하는데 선봉에 선 혜명 상좌가 대유령에 이르렀다. 6조는 혜명이 오는 것을 보고 의발(가사와 발우)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이 의발은 달마대사 이래의 신표이니 어찌 힘으로 대결할 것인가? 그대가 힘으로 가져갈 수 있거든 소원대로 가져가라.” 그러나 웬일인지 의발은 바위와 함께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점차 두려운 생각이 들면서 잘못을 깨달은 그는 무릎을 꿇었다. “행자님, 소승은 의발을 탐내어 쫓아온 것은 아니며 오직 불법을 구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원컨대 이 몸을 가엽게 생각하고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혜능은 이때 말한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하라.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때에 그대의 진면목眞面目은 무엇인가”하고 그에게 되물었다. 혜명은 언하에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다시 물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밀어밀의(密語密意) 외에 또 다른 의지(意旨)가 더 있습니까?”
“내가 지금 설한 것은 결코 밀의가 아니요, 밀의는 그대 스스로의 면목을 마음으로 밝혀보는(反照) 바로 그곳에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밀의(密意)-그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갖추어져 있는 본래 면목인 ‘마음’. 물들지 않은 그 마음(先驗)을 아는 데에 있지 않을까?.

선·악을 초월한 무심(無心).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마음의 저울눈금이 제로(0)인 상태. 오염 되지 않은 본래의 마음을 자각하면 그 이분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불사선 불사악,’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맹난자 수필가는
한국수필문학 진흥회 고문. 국제펜 자문위원. 前 〈에세이 문학〉 발행인 겸 주간, 한국문인협회 상벌제도위원장. 〈더 수필〉 선정위원장을 역임했다. 현대수필문학상, 남촌문학상. 신곡문학대상. 조경희문학대상. 현수필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