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33. 단단한 삶의 기포 찾아서

33. 유인서의 ‘표정’

2023-06-09     승한 스님(불교문학연구소장)

표정/ 유인서

서울역 화장실, 토닥토닥 화장중인 또래의 처녀에게 건네지는 거울 속 여승의 눈빛이 아슴하다 더러는 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동성로 현란한 거리에서 지나가는 남녀들 보던 밀짚모자 속 어린 여승의 눈빛도 저것이었다 찰나 속의 하염없음

예초기가 지나간 풀밭 위의 바람 냄새, 애벌 깎은 나무의 속껍질 냄새, 놋식기의 엷은 쇠비린내, 감기 끝에 돋아난 생비린내, 갓 버무린 겉절이 냄새 같은 사람의 냄새

어둑살 내린 직지사 대웅전, 찢어진 파초그늘에서 훔쳐들은 젊은 스님네의 염불 소리도 저 부근에 있었다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과도 닮지 않은 특이한 슬픔의 질감이 거기 있었다 손끝으로 쓸어본 그것의 표면에는 흑점 같은 어혈 같은 목탁 소리 물소리에도 풀리지 못한 단단한 기포가 남아 있었다

쉬이 물크러지지 않을 열망의 그림자를 앞세우고 가는 저이들의, 몸이 고요해지고서야 끝내 닿을 수 있다는 그 곳은, 어디

- 유인서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창비, 2005

아, “사람의 냄새”가 바로 그것이었구나. 사모하던(사무치던) 여승의 냄새가 바로 그것이었구나. 바로 (진짜) 사람에게만 나는 “사람의 냄새”였구나. 아, 여승의 눈빛이 바로 그런 것이었구나. “서울역 화장실”에서 “토닥토닥 화장중인 또래의 처녀에게 건네지는 거울 속” “아슴”한 눈빛이 그것이었구나. “동성로 현란한 거리”를 “지나가는 남녀들”을 몰래 “보던” “밀짚모자 속 어린 여승의 눈빛”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찰나”지만 영원하고 “하염없”는.

“예초기” 같은 예리한 감각을 지닌 유인서 시인은 그 냄새를 “예초기가 지나간 풀밭 위의 바람 냄새”, “애벌 깎은 나무의 속껍질 냄새”, “놋식기의 엷은 쇠비린내”, “감기 끝에 돋아난 생비린내”, “갓 버무린 겉절이 냄새”라고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여승’이라고 해서 그런 냄새가 싹 지워진 ‘사람 너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유인서 시인은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승의 눈빛 또한 그렇다. ‘여승’이라고 해서 우리 중생이 가 닿지 못한 저 어디, 높은 사막이나 설산이나 천상에 사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또래 처녀들처럼 “서울역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토닥토닥 화장을 하고 싶기도 하고, “동성로 현란한 거리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화양연화(花樣年華)들처럼 연애를 하고 싶기도 하다. 물론, ‘찰나’지간이지만 ‘하염없’이. 필자가 (특히 젊은) 여승들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들도 그 같은 “사람의 냄새”를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목석(木石) 같은 사람이 어찌 사람이겠는가. 그냥 돌덩어리와 나무이지. “사람 냄새”가 안 나는 중[승(僧)]은 중이 아니다. 그냥 막가지다. 그런 막가지에게는 불자들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 냄새를 못 맡는데, 어찌 내 ‘삶의 냄새’(마음)를 맡아주고 알아주고 안아주겠는가.

근데, 기막힌 것은 “젊은 스님네의 염불 소리”가 “저 부근”(어둑살 내린 직지사 대웅전, 찢어진 파초그늘)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과도 닮지 않은 특이한 슬픔의 질감이 거기 있”다는 것이다, “흑점 같”기도 하고, “어혈 같”기도 한. 유인서 시인이 앞 연에서 “사람 냄새”를 말하고 “밀짚모자 속 어린 여승의 눈빛”을 얘기한 것도, 기실은 이 말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흑점 같”기도 하고, “어혈 같”기도 한 “특이한 ‘슬픔’의 질감”은 오히려 “특이한 ‘희망’의 질감”이다. 대자유, 대자재, 대해탈의 통쾌한 삶을 위해, 시원한 삶을 위해 모든 비탄과 절망과 고뇌와 청춘과 사랑을 내려놓고 “어린 여승”은 이 더운 여름날 찢어진 “파초그늘에서” 오직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부처님을 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염불이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과도 닮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유인서 시인은 단지, 단지, 그것 때문에만 “젊은 스님네의 염불 소리가”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과도 닮지 않은 특이한 슬픔의 질감이 거기 있”다라고 했을까. 아니다. 유인서 시인의 속셈은 바로 그 다음 행에 있다. “목탁 소리 물소리에도 풀리지 못한 단단한 기포가 남아 있었다”. 이 한 행이 바로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과도 닮지 않은 특이한 슬픔의 질감이 거기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기포(氣泡)가 무엇인가.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서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유인서 시인은 그 기포를 “목탁 소리 물소리에도 풀리지 못”하는 “단단한 기포”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단단한 기포이기에 “목탁 소리 물소리에도 풀리지 못”하는 걸까.

맞다. 삶은 분명 ‘포영’(泡影)이다. 한바탕 ‘기포’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출가하고, 어떤 이들은 불자가 되고, 또 어떤 이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불경을 읽고 부처님 이야기를 되새김하며 산다. 그때 기포와 포영은 그냥 기포와 포영이 아니라 ‘단단한’ 기포와 포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인서 시인은 시치미를 뚝 떼고 “그 곳은, 어디”라고 마지막에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럼, 유인서 시인의 말처럼 “그 곳은 (정말) 어디”일까. “쉬이 물크러지지 않을 열망의 그림자를 앞세우고 가는 저이들의, 몸이 고요해지고서야 끝내 닿을 수 있”는 “그 곳은,” 정말 “어디”일까. 어디에 있을까. 바로 내 곁에 있다. 내 속에 있다. 내 내부에 있다. 대자유, 대자재, 대해탈하겠다는 ‘단단한’ 다짐은 안과 밖, 내부와 외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안’이 곧 ‘밖’, ‘내부’가 곧 ‘외부’인 것이다. 안과 밖이 한 몸으로 안팎 없이 존재하고 있고, 내부와 외부가 ‘찰나’의 거리도 없이 한 몸으로 붙어 있는 것이다. 안과 밖을 일러 안과 밖이라 할 수 없고, 내부와 외부를 일러 내부와 외부라 구분 짓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린 여승”, 아니 모든 승려들의 “쉬이 물크러지지 않을 열망”이고 “기포”이고 “몸이 고요해”져야만 “끝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 모두 ‘자성불’(自性佛)인 것이다.

시인의 노래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그 곳은, 어디”를 찾아 우리는 오늘 또 다시 삶의 여정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몸이 고요해지지 못 하면 끝내 닿을 수 없는 “그 곳은 어디”를 찾아 다시 힘차게 떠나보자. 서로의 ‘표정’을 ‘표정’ 삼아 새로운 열망의 길을 떠나보자. 거기 ‘단단한 기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