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문학살롱] 9. 봉인사(奉印寺)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허상이었다 딸과 함께 체험한 봉인사 템플스테이 영가 떠도는 백중이라 으스스한 느낌 잠 설치고 만난 부처님, 딸에 건넨 말 ‘웃기냐, 세상사 별거 아니다’란 충고 모든 것 空하다는 〈반야심경〉 가르침 천국도 지옥도 모두 마음이 만드는 것
작년 여름, 휴가를 받은 딸들과 남양주에 있는 봉인사로 템플스테이를 갔다.
사찰에 도착하니 빗발이 굵어진다. 장마철 우기에 흠뻑 젖어있는 산사는 푸른 숲과 뒤엉켜있다. 입소 확인을 위해 종무소에 들르니 싸한 공기가 훅 안긴다. 으스스한 느낌은 비가 내리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종무소 직원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옆 사무실에 가서 의뢰하라고 한다. 그녀의 무반응에 주춤한다.
후려치는 빗줄기를 피해 우산을 접고 옆 사무실로 들어섰다. 입실을 허락받기 위해 우리 삼 모녀는 후줄근한 모습으로 안내하는 처사님 앞에 섰다. 마치 죄지은 교도소 수감자들 같다.
여름철 숙소는 삼복중 열기와 습기로 한증막이다. 방은 셋이 누우면 족했다. 텅 빈 방에는 선풍기 한 대와 얇은 요 세 채에 베게 세 개가 전부다. 창문은 우거진 나뭇잎이 커튼처럼 빼곡히 가리고 바람을 차단한다. 우리는 나누어준 법복으로 갈아입었다. 문득 영화 〈7번 방의 선물〉 한 장면, 교도소를 떠올리게 한다.
입소를 마친 우리는 뜻있는 추억만들기에 생각이 분분했다. 이른 저녁 공양을 마치고, 잠깐 비 그친 틈을 타서 사찰을 두루 돌아보기로 했다. 비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은 이미 어둠을 흩뿌리고 있다. 지장전 뒤에 있는 어둑한 산책로로 들어섰다. 조금 올라가니 어둑한 그곳에는 영가들을 모신 봉안묘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뒤따르던 딸애가 그만 내려가자고 옷깃을 잡아끈다. 으스스한 냉기가 따라오는 듯하다.
우리는 사찰 반대편 산책로로 다시 접어들었다. 그냥 숙소로 들어가기 아쉬워 우거진 나무 숲길을 따라 걸었다. 왠지 그곳은 한적하고 아름다운 산길일 것만 같았다. 조금 올라가니 그곳에도 영가들을 모신 봉안묘가 수없이 이어져 있다. 뜨악한 표정을 짓는 딸애를 보고, 이곳은 영가를 모시는 지장전 사찰이라 봉안묘가 많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딸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끈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해 떨어지면 이곳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면이 숲이고 적막강산이다. 우리는 사찰 지침대로 일찍 불을 끄고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잠을 청한다.
두 아이 엄마인 큰딸은 아이들 걱정으로 매 순간 마음 무겁게 산다. 내가 살아온 삶보다 더 무거운 짐 지고 살아간다. 학교 교육, 사교육, 성장 과정의 애환이 내 아이 셋 키울 때보다 열 배는 더 힘든 것 같다. 무거운 짐 지고 하루하루를 초고속으로 달리기하는 딸을 보니 측은하다 못해 안타깝다. 그 무거운 짐 잠시 벗어놓자고 엄마와 함께 산사를 찾았을 텐데 막상 오고 보니 이곳 또한 만만치 않다.
그쳤던 비는 다시 줄기차게 내린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엄청난 굉음으로 창문을 타고 넘어온다. 무단침입이다. 창문을 닫고 싶어도 밀폐된 공간에 선풍기 혼자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쉽게 잠들 것 같지 않다.
딸들은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하는 눈치다. 저녁을 마친 후, 곧바로 숙소로 들어왔어야 했다. 공연히 산책하자고 이쪽저쪽 사방에 둘러싸인 봉안묘를 보게 할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는 영가들이 잠들어 있는 봉안묘지 한가운데 누워 잠을 청하고 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면 마음이 평화로웠을 것이다. 원효대사가 밤중에 해골에 든 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신 것처럼.
백중에는 모든 영가가 휴가를 나온다고 한다. 영가들은 49일간 이승을 떠돌며 자손들이 조상님 극락왕생을 위해 지내는 잿밥 얻어먹고 떠난다고 한다. 조상을 모시는 나도 해마다 시부모님을 위해 백중기도를 올린다.
하필 모든 영가가 떠도는 백중 기간에 이곳에 왔나 싶다. 이 어둠 속에서 영가들이 눈을 번뜩이며 수없이 우리 곁을 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만 뒤척여진다. 딸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쉬이 잠들지 못하는 눈치다. 오로지 엄마를 위해 금쪽같은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는 딸들에게 미안했다.
세찬 빗소리와 함께 선풍기는 끼익끼익 신음한다. 설핏 잠이 들려는데 바람 소리에 문소리가 덜컹한다. 동시에 딸이 “으악!” 소리를 지른다. 느닷없이 지르는 소리에 더 놀라 한동안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다. 잠들지 못한 딸아이에게 그 소리는 천둥소리와 같을 것이다. 다시 잠을 청해보는데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빗소리보다도 더 크게 창문을 타고 들어온다. 어느새 새벽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잠 설친 세 모녀의 모습이 초췌하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패잔병들처럼 ‘큰 법당’ 앞마당에 들어섰다. 마당에는 300살 먹었다는 큰 살구나무가 손을 높게 펼치고 우뚝 서 있다. 마당 전체를 그늘 지울 만큼 웅장하다. 비 갠 하늘은 민낯을 드러내고 해맑게 내려다본다. 온통 초록빛으로 싸여있는 절 풍경은 근엄하고도 아름답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고 고적하다. 괴괴 망상으로 잠 못 들었던 생각을 한순간에 싹 거둬낸다.
큰딸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실없이 웃는다.
“왜 웃어?”
“엄마, 부처님이 나를 보고 ‘웃기냐?’ 했어요.”
뜬금없는 말에 귀를 기울이니 작은 소리로 말을 한다. “부처님이 세상사 다 별거 아니래요.”
밤새 끼익 대며 돌아가던 선풍기 소리, 자지러지게 쏟아지는 빗소리, 심장을 멈추게 하는 문소리, 산속을 뒤흔드는 자동차 엔진소리, 영가들 봉안 묘지로 둘러싸인 잠자리, ‘어떻게 하면 자식을 잘 키우나…’하는 오만가지 잡념으로 시달리다 잠을 설쳤는데, 막상 부처님 앞에 서니 모든 것이 허상이었구나,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고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단다. 멋쩍게 웃으며 부처님을 바라보니 온화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웃기냐’ 하는 것 같더란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병이라고, 힘겹게 들고 있는 근심 걱정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딸은 해맑게 웃는다.
내가 평생 불자입네 살아왔지만, 일말의 깨달음도 얻지 못한 것을 딸애는 한순간에 알아차렸다. ‘석가모니가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팔만대중 중에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마음이 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만든다더니 비 그친 봉인사는 그 여느 사찰 못지않게 아름답다. 처음 싸하게 느꼈던 사찰에 대한 선입견도, 퉁명스럽게 보였던 종무소 직원의 반응도, 무섭고 괴괴하게 느꼈던 사찰도, 수없이 안착한 봉안묘의 으스스함도 다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웃겼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기냐?” 부처님이 알아차리게 한 화두로 위안받으며 이겨낼 것이다.
오랜 세월 부처님 곁에 머물렀지만, 법문의 가르침에 이르지 못했다. 뜻도 모르고 〈천수경(千手經)〉을 외웠고, 무심히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읽었다.
어느 날 맹난자 선생을 만났다. 맹 선생은 〈반야심경 강의(김성규 지음)〉라는 책을 선물로 줬다. 〈반야심경〉을 아주 쉽게 풀이해놓은 책이다. 아무리 쉽게 풀이해놓았다 하더라도 〈반야심경〉의 깊은 뜻을 한순간에 헤아리기는 어렵다. 스님들이 공의 원리를 깨닫기 위해 평생을 공부한다고 하듯이, 그 어려운 깨달음을 어찌 미흡한 중생인 내가 한순간에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반야심경〉은 가장 뛰어난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는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것도.
“물질(육신)이 공과 다르지 않고(제행무상)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공이며(제법무아) 공이 바로 물질이다.”(〈반야심경 강의〉 35p)
육신을 이루면서 살아있는 동안을 색이라 하면 육신이 흩어진 죽음은 공이라고 한다. 결국 지, 수, 화, 풍으로 이루어진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 형상을 이루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공으로 돌아가게(제행무상)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로병사는 인연의 작용(제법무아)에 의하여 주하다가 흩어지는 과정일 뿐이라고.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좋아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다. 물체나 물체작용이나 정신이나 정신작용이나 모두가 공이라 이 도리만 알면 우리는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이처럼 어려운 법문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요즘은 〈반야심경〉을 읽으면 마음이 달라진다. 뜻 하나하나에 마음 조아리게 된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아서(諸行無常)
끝없이 났다가 없어지나니(是生滅法)
나고 없어지는 법 깨닫고 나면(生滅滅已)
진리의 바다 고요하여 즐거우리(寂滅爲樂)’
부처님께서 나찰에게 이 게송을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보시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부처님이 목숨 걸고 얻은 게송을 나는 너무도 쉽게 얻었다. 이 게송만으로도 내 삶의 질이 달라지는 축복을 받았다.
〈반야심경〉을 마무리하는 지혜의 주문은 가장 중요한 설법이다.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목숨을 건 지극한 마음으로 세 번만 암송하면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고 한다. 어떠한 상황이든 진심으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게 되어있다는 뜻일 것이다. 일말의 의심 없이 부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라야 이룰 수 있으리라 믿는다.
딸아이가 부처님이 가만히 내려다보며 ‘웃기냐’했다고 믿는 것처럼, 진심으로 믿는 그 마음은 모든 것을 지혜의 완성으로 인도할 것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김산옥 수필가는
강원도 평창 출생. 2005년 〈현대수필〉로 등단. 수필집 〈하얀 거짓말〉, 〈비밀 있어요〉, 〈왈왈〉 등이 있다. 산귀래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김우종문학상·일신수필문학상·청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