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27.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의 몫

27. 이승애의 ‘雨요일’

2023-02-24     승한 스님(불교문학연구소장)

雨요일/ 이승애

길가 목마른 나무들
서두르지 않아도 골고루 공양을 받는다
하늘이 차려준 빗방울 밥상이 푸짐하다

불이 꺼진 디지털플라자 간판
불이 켜진 서부병원 간판도
먼지 낀 얼굴을 씻고
모처럼 비를 떠먹는다

무량으로 내리는 비

불빛에 반사된 풀잎들은
방울방울 빗방울 연등을 켜고
굽은 등을 펴고 있다

굵어진 빗발들이
짙은 어둠을 건너가는 소리

탁발하듯 자동차 불빛이 따라간다

골목에 젖고 있는 폐지들
빗방울 경전을 읽는 중이다

(이승애 시집, 〈둥근 방〉, 도서출판 지혜, 2022)

그것참, “폐지들”이 “경전을 읽”고 있다니, “골목에”서 (빗방울에) “젖고 있는 폐지들”이 “빗방울 경전을 읽”고 있는 중이라니, 놀랍다. 아니, 절묘하다. 이쯤 되면 이 “폐지들”은 이제, 폐지들이 아니다. 할머니들이다. 할아버지들이다. 우리들이다. ‘시인의 눈’이 아니면 도저히 발견해낼 수 없는, 이 땅의 (가난하고, 병들고, 낡고, 찢어진) 중생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간난에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해탈’[解脫, 성불(成佛)]을 위해 수행하는 이 땅의 불제자(佛弟子)들이기도 하다.

수행에는 특별한 시공(時空)이 필요치 않다. 모든 곳이 수행처다. 모든 곳이 ‘불교 하는’ 곳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정진하는 것, 그것이 참 수행이자, 참 수행자의 모습이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이승애 시인은 “골목에(서) 젖고 있는 폐지들”을 보았을 것이다. 자비와 연민의 불심(佛心)이 가득한 이승애 시인의 시안(詩眼)은 그것을 그것으로,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었을 터, 이 시인은 그 순간 “폐지들”에서 굽은 등으로 리어카 가득 폐지를 수미산처럼 싣고 휘청휘청 좁은 골목길을 밀고 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순간 이 시인의 시적 마음이 저절로 작동해, 젖은 “폐지들”이 “빗방울 경전을 읽는 중”이라고 탄성을 쏟아낸 것이다. ‘빗방울 경전’이라는 은유도 신묘하다.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시적 깊이도 깊이지만, 이 한 구절만으로도 이 시인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자비와 연민의 불심과 시에 대한 열정(열망)을 느낄 수 있다.

이승애 시인의 그런 삶은 1연에서부터 스스럼없이 드러난다. ‘비 오는 날’[雨요일, ‘비 오는 날’을 ‘雨요일’로 표현한 것도 퍽 재치 있다], ‘하늘’(부처님)이 푸짐하게 차려준 ‘빗방울 밥상’을 골고루 ‘공양’ 받는 “길가(의) 목마른 나무들”, 그 나무들이 바로 고집멸도의 우리 중생들이고, 그 ‘빗방울 밥상’은 우리 중생들에게 곧바로, 감로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감로수는 이승애 시인의 마음에 항상 흐르고 있는 생명수(연민과 자비)다. 그것도 ‘무량’으로. 여기서 잠깐 생각나는 〈법화경〉 ‘제5품 약초유품’ 한 토막. “빽빽한 구름이 가득히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단비가 고루고루 흡족하게 내리면, 모든 초목과 숲과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잎새와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새와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새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상중하를 따라서 제각기 비를 받는데,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는 그 초목의 종류와 성질에 맞춰서 자라고, 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느니라.”라는 대목이다. 이 시인은 분명히 〈법화경〉 ‘제5품 약초유품’에 평소에도 가랑비에 옷 젖듯 젖고 살았을 것이다.

“불빛에 반사된 (비에 젖은) 풀잎들”을 “빗방울 연등”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승애 시인의 시적 내공과 연혁을 보여준다. 이만큼의 내공을 쌓기 위해선 (습작 등) 이 만큼의 연혁을 갖고 있으리라, 의태어인 “방울방울” 역시 ‘불이 켜져 있는’ 연등을 연상시켜 읽는 이들의 의식을 즐겁게 한다. “‘탁발’하듯 자동차 불빛이 따라간다”는 중의적 표현 역시 마찬가지. 깊은 사색과 분석과 인식 없인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시적 해석이다. 그렇다. 승려는 한마디로 ‘걸사’(乞士)다. ‘빌어먹고 사는 사람’(거지)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불교를 창시한 뒤 ‘탁발을 강조하고 강조한’[걸식(乞食)] 것은 ‘무소유’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출가=승려=걸사=무소유’였던 것이다. 이승애 시인은 그것을 이 시에서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한 생각. 이승애 시인은 왜, 한 행에 불과한 “탁발하듯 자동차 불빛이 따라간다”를 한 연으로 비중 있게 처리했을까? 어떤 속셈으로 이렇게 배치했을까. 이승애 시인이 던져준 그 의문과 의도를 생각하며 이 시를 읽는 것도 이 시를 읽는 큰 즐거움이자 행복이다.(모든 시가 다 그렇다. 시인이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분석하고 인식했는가를 생각하며 시를 읽으면, 아무리 난해한 시라도 시 읽기가 훨씬 쉽고 즐겁고 행복하다. 시를 보는 안목도 매우 높아진다.) 그 의도는 바로 앞 연인 5연에 내재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굵어진 빗발들이/ 짙은 어둠을 건너가는 소리”) 앞에 ‘현대문명’(“자동차 불빛”)은 초라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그보다 더 초라한 ‘폐지’가 ‘빗방울 경전’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반전함으로써 이 시는 논리 너머의 논리를 획득하며 멋들어진 시로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은밀한 사회적 풍자성도 갖고 있다. “골목에 젖고 있는 폐지들”마저 자신들을 젖게 하는 “빗방울”들을 “경전” 삼아 공부(수행)하고 있는데, 현대문명(“자동차 불빛”)만 숭상하는 당신들은 뭣하고 있냐고 점잖게 호통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폐지’가 됐어도 ‘폐지’로 살지 말고 수행하듯 정진하듯 삶의 ‘경전’을 읽으며, 충만하게 살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삶의 내용과 무게는 풍요와 권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맛과 질’로 결정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