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25. 이곳이 바로 보살들의 천국

25. 고재종의 ‘보살’

2023-01-21     승한 스님(불교문학연구소장)

보살 / 고재종

기역 자로 굽은 허리로
유모차를 밀던 할머니,
오늘은 작은 호박덩이로 말아져
그 유모차 위에 앉혀졌다
그걸 기역 자로 굽어 가는 허리로
이웃집 할머니가 다시 미는
돌담과 돌담 사이
잠시 하느님도 망각한 고샅길에선
누구도 시간을 묻지 않는다
참새 한 마리도 외로운지
딱딱한 것들의 목록뿐인
할머니의 어깨에 살폿 내려와 앉는
저 꿈같은 일에
아기처럼 웃는 할머니의 미소에
누구도 값을 매기지 않는다
다만 동구 밖 느티나무 잎들은
아무것도 원함이 없는
할머니들의 요요적적에 대해서
설(說)함이 없이 설하고
이미 거기 느티나무 아래
풍경이 되어 버린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들음이 없이 다 듣는다

-고재종 시집, 《꽃의 권력》, 문학수첩, 2017

지난해 중반께, 고재종 시인으로부터 시집 한 권과 함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승한 스님께, 성불하십시오. 보내주신 시집 약력 중 ‘퍽 환한 하늘’이 있어 이진영 시인님인 줄 알게 됐습니다. 출가했다는 소식은 진즉 들었습니다만, 시집을 통해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중략〉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저도 오래 전부터 불교공부에 빠져 최근에 〈선문답과 한국현대시의 교감〉이라는 원고를 2000매 가량 써서 출판을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독학이라서 원고 중, 선문답 부분을 좀 감수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고 시인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필자는 눈에 보리 까시래기가 들어간 듯 쓰렸다. 십수 년 동안 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고 시인의 편지 내용이 하도 곡진하고 무거워서였다. 불교 공부에 빠져 원고를 2000매나 썼다니, 공부도 보통 공부가 아니었다. 뒷날 들은 얘기로, 긴 죽음의 세월을 고 시인은 오로지 불교공부 하나로 버텨왔다는 것이었다.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선 그 책을 내지 못하고 광주광역시에 있는 출판사(문학들)에서 500쪽이 넘는 두께로 그 책을 발행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2021년 출판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의 지원을 받아 책을 펴내게 됐다.(〈시를 읊자 미소 짓다〉라는 책명으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많은 언론과 독자들에게 회자됐다.

필자가 고 시인과의 사연을 이리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은 것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삶과 그 삶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그의 시 때문이다. 전남 담양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그 농촌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과 건강 문제 때문에) 딸기 농사(담양은 딸기 농사로 유명하다) 대신 시농사만 짓고 살아온 고 시인의 영농법을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이다. 고 시인이 죽음의 긴 생애를 바쳐 2000매가 넘는 불교공부를 한 것도 “내 인생은 시작도 못했는데 이미 실패해 버렸다는 생각”에 ‘“죽음의 시간이 오기 전에 진리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는 것”(프레데리크 시프테), 오직 그 하나의 행복만은 누리고 싶은 마음’(이상 〈시를 읊자 미소 짓다〉 작가의 말 중에서)이 구절초 향기처럼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이 시에도 고 시인의 그런 삶(세상을 보는 눈)이 잘 드러난다. “누구도 시간을 묻지 않는”, 그래서 “하느님”마저도 “망각한” “돌담과 돌담 사이” “고샅길”에서 늙은 할머니가 더 늙은 할머니를 유모차에 태우고 (딱히 목적지도 없는) 마실을 가는 모습이 선경후정(先景後情)으로 다가온다.

“참새 한 마리도 외로운지/ 딱딱한 것들의 목록뿐인/ 할머니의 어깨”는 이 시가 내뿜는 절창 중의 절창이다. 살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가죽만 남은 두 할머니의 모습(“딱딱한 것들의 목록뿐”)을 (어느 시인이 있어) 이토록 아프고 절절하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이것은 오직 고재종 시인이 평생을 농촌에 살면서 “호박덩이로 말아져” 가는 할머니(보살)들과 살기 때문에 인식하고 발견해낼 수 있는 삶과 풍경의 미학이다. 그러기에 그 할머니(보살)들의 삶엔 “누구도 값을 매기지 않”고, 매길 수도 없다. 오직 “동구 밖 느티나무 잎들”만 바람에 흔들리며, “설(說)함이” 없는 “설”을 할 뿐, “이미” “풍경이 되어 버린 할머니들”만 “들음”도 “없이” “다 듣”고 있다. 삼처전심(三處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일 뿐이다.

고재종 시인은 ‘보살’이라는 시를 통해서 ‘보살’의 평범성과 존재성을 묵언의 미학으로 알려주고 있다. 보살이라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다 보살이고, 우리의 삶이 다 보살의 삶이다. 그 삶이 호박덩이로 말아져 가면, 깨달음이 된다.

보살을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을 위해 보살의 사전적 정의를 짚고 가자. 보살의 첫 번째 의미는 ‘부처가 전생에서 수행하던 시절, 수기를 받은 이후의 몸’을 말한다. 보살의 두 번째 의미는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 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을 말한다. 보살의 세 번째 정의는 삼승(三乘)의 하나로서 보살이 큰 서원(誓願)을 세워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교법을 말한다. 보살의 네 번째 의미는 절집에서 여자 신도(信徒)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다섯 번째 의미는 ‘고승’(高僧)을 높여 이르는 말이고,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의미는 머리를 깎지 않고 절에서 사는 여자 신도를 가리킨다.

그럼, 고재종 시인은 이 시에서 보살의 어떤 면(성격)을 취했을까. 언뜻 보면, 네 번째 의미의 보살 같다. 그러나 고재종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보살의 의미는 위의 여섯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보살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고, 깨달음 또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와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