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24. 삼세인과, 부용화는 누구의 환생일까?
24. 유강희의 ‘여승ㅡ귀신사에서’ 실제 주인공 생생히 표현한 詩 주인공, 설화 속 부용화로 비유
여승ㅡ귀신사에서 / 유강희
이승의 빛과 저승의 빛을 한데 섞으면
저런 빛일까
처연하게 아름다운 빛
나는 순간 합장을 하고
여승은 조용히 그 꽃을 가리켰다
그 꽃은 부용화였다
함박 비를 맞고 있었다
유난히 파르란 여승의 머리에선
범부채 내음이 났다
빗방울보다 가벼운 가사가 소복이 여승의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나는 외려 몸이 굳어지고 입은 굳게 닫혀진 채 그 무엇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걸 느꼈다
나는 그저 여승의 발부리 앞에 엎드려 누님이라고 단 한 번만 불러보고 싶었다
어린애처럼 소리없이 울먹여보고 싶었다
여승은 절의 오래된 내력과 생의 덧없음에 대해 아직도 선 채 말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잔잔한 미소로만 들리었다
오늘은 칠월 칠석날 대적광전에선 법회가 끝나고 모두들 점심 공양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승은 극구 공양을 하고 가라 했지만 난 쫓기듯 그곳을 떠나왔다
내 전생의 누님 같은 여승은 꼭 부용화를 닮아 있었다
-유강희 시집 〈오리막〉문학동네, 2005-
거, 참, 묘하다. “비구니” 하면, (별로) 감정의 파동이 없다. 그런데 “여승” 하면, 눈물이 마렵다. 왜 그럴까. 필자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 ‘비구니(比丘尼)’나 ‘여승(女僧)’이나 ‘여자 승려’를 가리키는 것은 매한가지.
그런데 음색(音色)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령, 이 시의 제목을 ‘여승’이 아닌 ‘비구니’라고 생각하고 읽어보자. 시의 맛도 맛이려니와 해석과 분석과 인식의 맛도 전혀 다르다.
이유를 더듬어본다. 필자에겐 세 갈래의 ‘여승’이 있다. 백석의 ‘여승’과 송수권의 ‘여승’과 유강희의 ‘여승’이다.
언젠가 필자는 본 연재를 통해 이 세 시를 비교, 분석한 적이 있다(백석의 〈여승〉을 소개할 때다). 그때 필자는 말했다. 세 시가 (맛이)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다고. 또한, (분위기가) 전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고(그 분석은 아직도 유효하다). 필자가 그렇게 느끼는 데는 연원이 있다.
어릴 적이다. 어느 겨울날, 외할머니가 막내딸 집에 오셨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긴긴 동지 섣달 밤을 이야기로 지샜다. 필자도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막둥아, 너 방죽골 신동댁 알지야. 그 여편네가 중 되어부렀어야.”
“오메, 엄니. 그럼 애들은 어쩌고요?”
“큰집에 데려다놓고 가버렸다고 허드라. 모진 년.”
그러면서 외할머니는, 신동댁이 바람나서 나가버린 남편을 8년이나 기다리다, 순창 강천사로 가 중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그때 필자는 여자도 출가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로부터 20년 뒤, 필자는 백석 시인의 ‘여승’을 읽고 깜짝 놀랐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주고받으셨던 어릴 적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 내용이 흡사했던 것이다.
잠재의식은 언제나 놀랍다. 외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후 ‘여승’은 필자의 의식 속에 또 다른 무의식으로 고여 있었다. 백석의 ‘여승’을 읽으면서는 눈물이 나왔고, 송수권의 ‘여승’을 읽으면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유강희의 ‘여승’을 읽으면서는 ‘내 누나’ 같은 생각에 설움이 복받쳤기 때문이다. 불교에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것이 있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인과 결과, 다시 말해 과거에 지었던 업을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를 받고, 현재 짓는 업을 원인으로 미래의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의 핵심교리다. 그런 점에서 백석의 ‘여승’은 모성(과거, 전생)으로, 송수권의 ‘여승’은 누나(현재)로, 유강희의 ‘여승’은 이상(미래)으로 필자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거다.
사실 필자는 유강희 시인이 모델로 삼은 귀신사(歸信寺)의 여승과 잘 아는 사이다. 필자의 스승인 용타 스님(경남 함양 행복마을 이사장)의 친 여동생(무여 스님)이다. 출가 전에 필자는 귀신사를 자주 찾았고, 무여 스님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그 스님을 모델로 유 시인이 이 시를 쓴 걸 보고 깜짝 놀랐다(미련하게도 필자는, 무여 스님을 모델로 시를 쓴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했기 때문이다).
유강희 시인의 ‘여승’은 무여 스님의 모습을 매우 생생히, 그리고 가감 없이 잘 그려내고 있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 (그때) 무여 스님의 모습과 눈빛과 웃음과 목소리를 진짜로 (다시) 보고 듣는 것 같다. 유강희 시인의 여리고 순수하고 부끄럼 많은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유강희 시인은 하고 많은 꽃 중에 무여 스님을 왜 ‘부용화’로 비유했을까. 설화에 의하면 부용화는 비를 맞으면 한층 더 예쁘게 보인다고 한다(그것까지 계산했는지는 모르지만, 유 시인은 실제로 비 오는 날을 배경으로 삼았다). 부용은 또 용모뿐만 아니라 시(詩)에도 뛰어났던 성천(成川) 기생 연화(蓮花)의 별명이었다고도 한다.
야사 하나 더. 부용은 미모가 참으로 출중해 고을 원님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죽은 신라 때 부용 설화와, 실화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부용상사곡〉이라는 고대소설 속의 기생 이름이기도 하다(필자의 불손한 생각을 용서해주시길. 상상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므로. 실제로 무여 스님은 상당한 미인이다).
유강희 시인과 대학 동아리 시절이 생각난다. 키가 조그만 유강희 시인은 언제나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있었다. “극구 공양을 하고 가라 했지만” “쫓기듯 그곳을 떠나”온 그 모습처럼. 얼마 전 (30여 년 만에) 유강희 시인을 만났을 때, 유 시인이 필자에게 처음으로 “스님”이라고 부른 뒤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 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이 겨울을 입었는가. 필자도 그날 눈이 몹시 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