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23. ‘이 뭣꼬’, 우리는 왜 사는가?

23. 손택수의 ‘모기 선(禪)에 빠지다’

2022-12-19     승한 스님(불교문학연구소장)

죽비(竹篦)

열대야다 바람 한 점 들어올 창문도 없이 오후 내내 달궈놓은 옥탑방 허리를 잔뜩 구부러트리는 낮은 천장 아래 속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졸다 찰싹, 정신을 차린다 축축 늘어져가는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따끔 침을 놓고 간 모기

불립문자(不立文字)

지난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 납작하게 눌려 죽어 있다 이 뭣꼬, 후 불어냈지만 책장에 착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체액을 터트려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박혀 있는 모기, 너도 문자에 눈이 멀었더냐 책장이 덮이는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 문자에 눈먼 자의 최후를 그렇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냐 책 속의 활자들이 이 뭣꼬, 모기 눈을 뜨고 앵앵거린다

향(香)

꼬리부터 머리까지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짙푸른 독을 품고 치잉칭 또아리 튼 몸을 토막토막 아침이면 떨어져 누운 모기와 함께 쓰레받기 속에 재가 되어 쓸려나가는 배암의 허물

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은빛 날개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리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리 엄지와 집게만을 가지고도 능히 끌 수 있다 싶더니,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울음소리, 사라진 그쯤에서 잊고 살던 시계 초침소리가 들려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간간이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저 많은 소리들을 저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니”

(손택수 시집,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사, 2003)

아이고, 모기가 선(禪)을 하다니, 그놈 참 기특하다. 갸륵하다. 미물이 아니라 영물(靈物)이다. 장 콕토의 시 ‘귀’ 같다.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는다.” 장 콕토는 ‘귀’라는 작은 우주로 ‘바다의 파도’라는 우주의 소리를 들어냈다. 손택수 시인 역시 ‘모기’라는 하찮은 미물[속(俗)](손바닥을 때려죽여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에서 선(禪)이라는 최고의 승(僧)을 발견해냈다. 이렇게 하찮은 것에서 성(聖)과 우주를 발견해내는 것이 ‘시인의 눈’[시안(詩眼)]이다. 변방의 변방을 중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시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기쁨이다. 사치(?)다.

와-, 그런데 손택수 시인은 절집 속내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었을까? 가톨릭 신자로 알고 있는데 젊은 나이에(이 시는 그가 30대 초반에 펴낸 첫 시집에 실려 있다) 어떻게 그리고 절집 풍속과 어려운 불교 용어들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을까? 손택수 시인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알기 전에 필자는 그의 첫 시집인 <호랑이 발자국>을 읽고 그가 틀림없이 불자일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큰절, 부방장 스님, 석종, 부도, 돌종, 중, 참선, 죽비, 불립문자, 이 뭣꼬, 용맹정진, 향, 은산철벽, 설법, 골굴사, 관음, 지장, 약사 부처, 경, 팔만대장경, 사경, 금강경, 반야심경 …. 모두 그의 첫 시집 안에 들어 있는 불교용어들이다. 45개가 넘는다. 이 정도 용어를 알고, 그 용어를 용법에 맞게 정확히 쓰려면 불교에 대한 상당한 내공이 없이는 그 용어들을 쓸 자리에 정확하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손택수 시인의 첫 시집을 읽고 그가 틀림없이 불교신자일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로 돌아가자. 시골 태생인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모기의 밥이 되어 살았다. 어떤 날은 너무 심하게 모기 밥이 된 탓에 온몸이 간지럽고 부어올라 병원까지 간 적도 있다. 그때는 모기가 보이는 즉시 “때려잡자 공산당”이 아니라 “때려잡자 모기”였다. 어쩌면 그때부터 모기와 공산당은 어린 필자에게 이퀄 관계[주적(主敵)]였는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기는 보이는 족족 때려잡아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손 시인은 그런 모기를, 자신의 팔뚝에 입(침)을 꽂아 놓고 (맛있게) 피(밥)를 빨아먹는 모기를 ‘후줄근하게 늘어진 자신의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따끔한 침’을 놓는 죽비로 승화시켜놓았다. 시인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고 발견해낼 수 없는 비유이고 상징이다(시인들은 아마 이 비유와 상징의 즐거움 때문에 시 쓰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불립문자 또한 어떤가. 불립문자는 “불도(佛道)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가 납작하게 눌려 죽어 있다”. 필자도 어린 시절 국어책을 읽다가 잠든 다음날 아침, 데칼코마니처럼 책 양쪽 면에 납작하게 눌려 죽어 있는 모기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필자는 여태껏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물며, 그것을 성스런 우주[선(禪)]로 읽고, 그 경계까지 모기의 도(道) 닦는 모습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봤다. 그런데 손 시인은 그것을 보고 (어릴 때인지, 시인이 되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손 시인은 바로 화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뭣꼬”.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이 뭣꼬”. “이 뭣꼬”. (끊임없이) 의심에 의심을 더하는, 최고의 간화선(看話禪) 화두 하나를 집어 들고 ‘용맹정진’했다. 손 시인이 얼마나 치열하게, 그리고 용맹하게 세상을 살아오고,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진솔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향’과 ‘은산철벽’에서도 그런 손 시인의 삶은 (부처님의 손바닥처럼) 감춘 것 하나 없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깨끗이 보여준다. 아무리 높은 도라도 도로서의 의무를 다하면 쓰레기에 불과하다. 도통했다고 오도송을 읊는 자신의 육신 또한 (내다버려야 할, 벗어버려야 할) ‘배암의 허물’(재)에 불과하다. 손택수 시인은 한창 젊은 나이에, 아니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리고, 자신을 알아버리고, 도를 알아버렸다.

불립문자, 그러기에 손택수 시인은 그 경지를 글(시)로 말할 수 없다. 글 너머에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글이 있고, 시 너머에 시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젊은 손택수 시인을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도로 가게 했을까. 손택수 시인은 지금도 그것을 “이 뭣꼬”, “이 뭣꼬”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미물에 불과한 모기 한 마리의 생로병사를 이렇게 정밀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한 세밀화는 본 적이 없다. 한 미물의 깨침 과정도 이렇거늘, 인간이라는 이름의 우리들은 과연, 지금 어떤 미물의 삶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