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스님의  제주 산방일기] 아라한과 입전수수

2022-12-02     인현 스님/ 제주 선래왓 주지

입전수수(入廛垂手),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사슴동산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어 속박에서 벗어난 비구들과 함께 전법선언을 하셨다. 영실의 아라한들도 그 가르침을 따랐다. 이은상은 1937년 한라산을 등정하는 그 초입에 아라동 산천단 소림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한라산신제단법당’이라는 간판이 붙어있고 그 건물 안에는 치성광여래와 독수선정나반존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이곳의 유래는 조선 성종 때 ‘목사이약동선생한라산신단기적비’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국태민안을 비는 중요한 나랏일의 하나로 한라산신제는 백록담에서 봉행 되었는데, 그때마다 적설과 한풍으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아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받들게 하고 비를 세웠다. 지금 이 비는 마멸되고 내력만이 전해진다.

은하수와 가까운 흰사슴동산 백록담은 바닷가 사람들에게 너무 먼 성스러움이다. 그 성스러움이 민간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조선 중기 이후 불교가 모든 권위를 내려놓은 것과 맞닿아있다. 그 예를 영실 나한의 수행동에서 오백장군동(洞)으로 바뀌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명소승〉에서 임제는 1578년에 한라산 영실기암을 유람하고 중국 전국시대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을 언급한 시를 남겼다. 이후로 민간에서 오백장군 설화가 만들어져 오백나한과 혼용되었다. 이는 다시 제주의 창조여신 설문대할망 이야기와 결합한다.

“설문대할망에게는 5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할망은 아들들을 위해 죽을 끓이다 그만 발을 헛디뎌 빠지고 말았다. 저녁에 돌아온 형제들은 죽을 먹으며 오늘따라 유난히 맛있다며 아우성이었다. 막내만은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해 죽을 먹지 않았다. 죽을 다 먹고 나서 밑바닥을 본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막내는 어머니의 살을 먹은 형제들과는 같이 살 수 없다며 고산리 앞바다로 내려가서 슬피 울다 차귀도의 장군석이 되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그 자리에 늘어서서 한없이 울다 지쳐 몸이 굳어 기암괴석의 군상이 되었다. 이 바위들을 ‘오백장군’이라고 한다.”

이때 막내가 내려간 곳이 서귀포 외돌개 또는 성산 일출봉, 신양리 장군바위라고도 한다. 제주 주민들은 각자 자신들이 사는 터전의 큰 바위에 한라산의 신령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내려온 한라산신은 헌신적으로 제주 사람을 보호한다. “중국의 황제는 호종단에게 탐라국 땅의 기운을 누르라고 명하였다. 이에 동쪽 종달리로 들어온 그는 혈맥을 자르며 제주성과 가까운 화북리에 이르러 ‘수수못행기물’의 혈을 뜨는 데 실패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한라산신의 동생은 죽어서 매로 변해 그를 쫓아 서쪽 고산리에 이르러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닻을 올린 호종단의 배를 북풍과 함께 몰아쳐 난파시켰다.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고 해서 그 섬을 차귀도(遮歸島)라 하고, 조정에서는 그 신령스러움을 포상해 광양왕(廣壤王)으로 봉하여 해마다 향과 폐백을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머니 산 한라의 기운은 제주민의 물, 땅, 온기, 숨이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된 작자 미상의 ‘영곡, 탐라십경’(18세기)에 잘 그려져 있다. 이 기운을 곁에 두고자 하는 바람으로 제주에 ‘절오백 당오백’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