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스님의  제주 산방일기] 한라산 베이스캠프, 존자암

2022-11-04     인현 스님/ 제주 선래왓 주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는 변방이었다. 그러나 한라산은 성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제주에 오는 관료와 양반들은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 기도를 올리고 시문을 한 곡이라도 남기고 싶어 했다. 그 베이스캠프가 존자암이다. 

“이 산이 멀리 2000리 아득한 바다 밖에 있으므로 실로 평생 꿈에서도 오지 못하는 곳이오, 오늘 우리의 유람이 어찌 운수소관이 아니겠소?” 판관 김치가 〈유한라산기〉에서 한라산을 등반하기 위해 존자암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밝힌 소회이다. 

그는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제주 성을 나섰다. ‘뱀과 같이 요리조리 구부러진 평평한 들과 물길을 따라 바위 사이에 핀 향기로운 풀과 철쭉과 진달래가 그림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말을 타고 노루악을 넘어 삼장동과 포애악을 넘었다. 이리저리 돌면서 남쪽으로 한 정사(精舍)에 도착하였다. 연하 속 푸른 바다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곳에 존자암이 있었다. 판자집 8~9칸이 띠로 덮여 있었고 사치스럽지도 더럽지도 않았다. 한 스님이 문밖에 나와 절을 하고 절집으로 맞아들였다. 그 이름을 물으니 수정(修淨)이라 했다.’ 

그보다 앞서 김상현은 〈남사록〉에서 ‘영실은 500나한도량 또는 천불봉이라 한다. 존자암은 지붕과 벽이 흙과 기와가 아닌 판잣집이며 9칸 집이다. 존자암 근처에는 20여 명이 들어갈 만한 수행굴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영태의 〈지영록〉과 이원진의 〈탐라지〉에도 ‘존자암은 원래 10리 거리의 영실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존자암이 있던 폐사지에는 계단과 초석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다’는 글이 있다. 

이상과 같은 기록들은 제주의 설화와 함께 어우러져 존자암과 영실의 이야기를 풍성하고 신비롭게 한다. 제주의 향토사학자들은 한반도의 불교문화가 이곳 영실의 존자암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위의 기록들과 〈고려대장경〉 제30권 ‘법주기’에 ‘부처님의 16제자 가운데 여섯 번째 발타라존자가 탐몰라주에 머물렀다’라는 이야기를 결합한다. 

거기에 가야불교 전래설과 아쇼카왕이 인도를 통일한 후 빠탈리뿌따에서 ‘일천결집(一千結集)’ 후 인도 변경과 다른 나라에 전도단을 파견하였다는 비문의 기록과 연결져 이해하려고 한다. 탐몰라주는 탐라이고 존자암이 당시 파견된 존자가 창건한 사찰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스리랑카와 태국, 미얀마에서도 전해지는데, 부처님께서 사위성에서 외도들을 교화하기 위해 천불로 화현하신 후 도리천에 가서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시고 상카시아로 하강하신다는 설화와 연결져 자신들의 나라에도 화현했다고 주장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신라 경주의 백률사로 하강하신 불족(佛足)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자신들의 땅에 나투어 정토가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제주 탐라인들도 그 마음으로 ‘영실(영축산의 여래향실)’, ‘천불동(千佛洞)’, 제자들의 수행처 ‘수행동(修行洞)’ 또는 ‘오백나한도량’, 부처님이 오신 길 ‘불래(佛來)오름’, 수행자들이 탁발할 때 사용하는 발우를 의미하는 ‘바리메오름’ 등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