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스님의 제주산방일기] 한라산과 노인성
찬바람이 분다. 숲이 아름다운 길을 열어 놓았다. 무채색 억새의 물결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유채색 화장세계 영실이 나온다. 바위와 나무들과 계곡의 물이 어우러져 세상을 장엄하고 있다. 그곳에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오백아라한이 머무는 아란야 존자암이 있다.
홍유손의 <소총유고> ‘존자암개구유인문’에 의하면 “존자암은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설 때부터 비롯되었으며, 이는 삼읍(三邑)이 정립된 이후에도 오래도록 전해져 왔다”고 했다.
한반도에서 산천 숭배 사상은 일찍부터 발달했다. 더욱이 나말여초에는 산천의 부족한 기운을 보강하여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복리를 기원하는 비보신앙이 크게 발달하였다. 한라에는 비보사찰로 법화사, 수정사, 원당사(불탑사) 그리고 존자암이 있었다. 특히 존자암은 조선의 불교탄압 이후에도 오래도록 ‘국성제(國成祭)’를 지내왔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목사나 어사들은 이곳에 들러 백록담에 올라 제를 지냈다.
한라산은 전설상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예로부터 부악(釜嶽)·원산(圓山)·진산(鎭山)·선산(仙山)·두무악(頭無嶽)·영주산瀛洲山)·부라산(浮羅山)·혈망봉(穴望峰)·여장군(女將軍) 등 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다.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를 뜻한다. 산이 높아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다.
한라산 영실의 존자암에서는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다. 노인성은 남극성(南極星)·수성(壽星)·수노인(壽老人)·남극노인 등의 별칭이 있는 별이다. 또 이 별은 북극성에 대칭되는 천구의 남극에 존재하는 항성이다. <사기> 천관서(天官書)에 춘분과 추분에 이 별을 볼 수 있으면 나라가 편안해지고 군주의 수명이 연장되는 반면, 보이지 않으면 전란이 일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추분 새벽과 춘분 저녁 때 남교(南郊)에서 그 출현을 기다렸다. 이 별을 남두(南斗)라고 칭하고 경배대상으로 삼아 기복을 축원한다. 이 신앙은 북의 북두(北斗)와 대칭되는 남의 칠성 신앙이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담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은 노래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연하 덮힌 골짜기 오백 바위 /기묘한 모습이 예사롭지 않네/ 스님이 탑에 기대어 구름을 보는 듯 /요대에서 신선이 달빛 소매로 춤을 추는 듯/ 한나라 나그네 황하 근원을 찾다가 북두를 범하고 /진나라 아이들 바다를 보며 배를 멈추지 못했네/ 장군들은 하늘의 기밀 샐까 두려워 /신령한 곳 굳게 지켜 입을 다물었다
이 시는 추사 김정희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한우(1818~1881)가 제주를 노래한 ‘영주십경가’ 가운데 ‘영실기암’이다. 영실이란 이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펼친 영산(靈山, 영축산)의 여래향실(室)을 닮은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이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