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금의 스토리텔링 본생담] 14. 안락국태자 이야기
고려시대 성립돼 조선 전기 성행 추정
지난 글에서는 〈월인석보(月印釋譜)〉 권 25에 기록돼 있는 ‘선우태자(善友太子) 본생담’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인 선우태자 이야기만으로 조선 전기 왕실에서 유행한 불경 고사를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어, 권 8에 총 17장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는 안락국태자(安樂國太子)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한다. 〈월인석보〉에 제목을 명시하지 않아서, ‘안락국 태자전’, ‘안락국 태자경’, ‘원앙부인 왕생극락왕생연’(鴛鴦夫人 往生極樂往生緣)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월인석보〉 이외에도 〈석가여래십지수행기(釋迦如來十地修行記)〉 〈신라함월산기림사적(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석가여래사적(釋迦如來事蹟)〉 〈석가여래십지행록(釋迦如來十地行錄)〉에 내용상의 큰 차이 없이 수록돼 있다. ‘안락국태자전’은 남전장경이나 북전장경에서 찾아볼 수 없어, 우리나라에서 민간소설 혹은 변문으로 창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안락국 태자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례는 1576년에 조선 왕실의 비구니 사원에서 그려진 그림과 1788년에 제작된 기림사(祇林寺) ‘삼세불도’의 하단 그림이 있다. 1576년 작 ‘안락국태자경변상도’는 그림 상단의 화기에 의거해서 ‘사라수탱’(沙羅樹幀)이라고 불렸으나, 그림에 적혀있는 방제의 내용이 〈월인석보〉 권 8의 ‘안락국 태자전’과 같아 ‘안락국태자경변상도’라 칭하고 있다. 1576년 작 ‘안락국태자경변상도’는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에 의해 처음으로 국내에 알려졌으며, 현재 일본 세이잔분고(靑山文庫)에 소장돼 있다.
이 그림은 조선 왕실 발원 불화로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약탈 반출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 그림의 상단에 기록된 화기를 통해서 만력 4년(萬曆, 1576년, 선조 9년) 6월에 비구니 혜원(慧圓)과 혜월(慧月) 등이 사라수구탱(沙羅樹舊幀)을 보았는데, 오랜 세월을 겪어 색이 흐트러지고 그 형상이 희미해져 알아볼 수 없어 구본을 바탕으로 새로이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안락국 태자경 변상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 인물이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화면은 상단 광유성인이 계시는 범마라국·중단 자현장자가 사는 죽림국·하단 사라수대왕이 있는 서천국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한 각 장면 마다 금니로 한글 창제 시기 당시의 한글로 해당 내용이 적혀있어, 이러한 표현은 조선 불화에서 매우 드문 사례에 해당이 된다. 그림에 적혀있는 방제(傍題)는 모두 25개로서, 앞서 언급했듯이 〈월인석보〉 권 8의 ‘안락국 태자전’과 내용이 일치하고 있으며, 25개의 방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그림①)
① 이것은 승열바라문이 서천국에 처음 팔채녀를 빌리러 온 것이니라.
② 이것은 원앙부인이 처음 공양미(齋米)를 바치러 궁 앞에 나와 계신 것이니라.
③ 이것은 광유성인이 팔채녀를 빌려서 범마라국으로 가시는 것이니라.
④ 이것은 승열비구가 팔채녀를 데리고 와서 광유성인을 뵙는 것이니라.
⑤ 이것은 승열바라문이 두 번째 서천국에 가시는 것이니라.
⑥ 이것은 승열바라문이 두 번째 와계시는데, 원앙부인이 공양미를 바치러 나와 계신 것이니라.
⑦ 이것은 사라수대왕과 원앙부인과 승열바라문 세 분이 서천국으로 가시는 것이니라.
⑧ 세 분이 죽림국을 지나실 때 부인이 못 움직이시니 두 분께 말하였다. “사람의 집을 얻어 저의 몸을 팔아주시고, 그 돈을 받아 저의 이름과 함께 광유성인께 받쳐주소서.” 슬퍼 두 분이 운다.
⑨ 이것은 승열비구가 자현장자집을 가르키는 것이니라.
⑩ 이것은 세 분이 풀숲에서 주무시는 것이니라.
⑪ 이것은 풀숲에서 주무시고 자현장자의 집으로 가시는 것이니라.
⑫ 이것은 자현장자 집에 세 분이 가셔서 계집종을 사라고 하는 것이니라.
⑬ 이것은 자현장자가 세 분을 모셔 “계집종의 가격이 얼마입니까” 물으니, 부인이 말하길 “내 몸 가격이 1천 근 금이며, 또한 배 속의 아기 가격이 1천 근 금이다”라고 하였다. 원앙부인이 2천 근 금을 받아 두 분께 바치는 것이니라.
⑭ 하룻밤 주무시고 문밖에서 세 분이 헤어지니 부인이 “꿈결이 아니면 어느 때에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이 선을 닦으면 이익을 얻으니 왕생게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으니 아기의 이름을 정해 주세요”라고 말하였다. 왕이 눈물을 흘리시며 부인의 뜻을 가엾이 여겨 아들을 낳거든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낳거든 효양이라 하라고 했다. 문밖에 서서 두 분이 헤어질 때 슬프게 우는 것이니라.
⑮ 이것은 승열비구가 금을 받아서 지고 가시는 것이니라.
이것은 부인을 팔고 사라수대왕이 승렬비구와 둘이 가시는 것이니라.
이것은 아기 안락국태자가 도망치다가 들켜서 장자집 종이 잡아가는 것이니라.
이것은 아기가 도망하여 아버지를 보러 가기 위해 뗏목을 타고 가시는 것이니라.
이것은 아기가 가다가 팔채녀를 만났는데, 사라수왕이 오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아기가 아버지를 만나 두 종아리를 안고 우니, 왕이 “너는 어떤 아이인데 종아리를 안고 우는가”라고 물으니, 아기가 말을 하지 않고 왕생게를 외우자 아버지가 아기를 안는 것이니라.
이것은 아기를 안고 우는 것이니라.
대왕이 아기에게 이르시되 “어제 네 어미는 나를 잃고 시름으로 살고 있는데, 오늘은 너를 잃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버지가 슬퍼하며 아기를 원앙부인에게 돌려보내실 때 노래를 부르시니 “알고 지내는 이 없는 이런 괴로운 길에 누구를 보려고 울면서 왔는가? 자비로운 원앙부인과 공덕을 닦는 내 몸이 깨달음의 길에서 마주 보리라.”
이것은 아기가 죽림국으로 돌아오는 것이니라.
아기가 돌아올 때 길에서 소 치는 아이를 보았다. 소치는 아이가 “안락국이는 아비는 보겠지만, 어미는 보지 못하고 시름이 깊도다. 장자가 노하여 부인을 죽이려하니 노래 부르시길 고운님 못보고서 슬피 우니, 오늘날에 넋이라 말하지 말라”라고 노래 불렀다.
부인이 죽어 세 동아리로 짤려 큰 나무 아래 던져졌더니, 아기가 울면서 세 토막을 모아놓고 서방에 합장하였다. 이에 극락세계에서 사십팔 용선이 공중에서 내려오니 접인중생(接引衆生)하시는 제대보살들이 사자좌(獅子座)로 맞아 가시니라.
‘안락국 태자경 변상도’의 그림과 내용을 기록한 25개의 방제만을 보면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월인석보〉 권 8의 ‘안락국태자전’의 마지막 부분에 “광유성인은 지금의 석가모니불이시고, 사라수대왕은 지금의 아미타불이시고, 원앙부인은 지금의 관세음보살이시고, 안락국은 지금의 대세지보살이시고, 승열바라문은 지금의 문수보살이시고, 여덟 궁녀는 지금의 팔대보살이시고, 오백 제자는 지금의 오백 나한이시다. 자현장자는 무간지옥에 들어가게 하였느니라”라는 기록을 통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광유성인이셨을 때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을 도해한 또 다른 사례를 기림사 ‘삼세불도’ 하단 부분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안락국 태자경 변상도’처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화면의 왼쪽에서부터 범마라국, 죽림국, 서천국, 극락으로 가는 용선 등이 그려져 있다.
아직까지 ‘안락국 태자전’의 기원 혹은 〈월인석보〉에 실린 이유에 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아미타삼존이라고 할 수 있는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그리고 대세지보살의 전생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한 가족이 모진 고난과 비극을 견디고 마침내 극락왕생한다는 결말을 통해서 정토신앙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아마도 ‘안락국 태자전’은 정토신앙이 가장 유행한 고려시대에 성립돼 조선 전기 민간에까지 널리 전파됐을 것이며, 현재는 삼척 안정사의 땅설법을 통해서 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