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스님의 제주 산방 일기] 꾀꼬리 오름과 보문사지
섬은 돌과 바람과 물이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제주는 바람과 돌은 많은데 물이 귀하다. 그러기에 물이 있는 곳에는 옛 절터가 많다. 물이 몸의 생명이라면 믿음은 마음의 생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 흐르는 물을 약수 혹은 죽지 않는 생명의 물이라 하여 감로수라고 한다.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오름이 시작되는 것구리(꾀꼬리)오름 기슭에 용수량이 제법 되는 샘이 흐르고 있는데 원물(院泉) 또는 절세미(寺泉)이라 한다. 그 이름은 보문사가 있었던 터이기에 붙여진 것이다.
보문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원진의 〈탐라지〉에 제주목의 여러 사찰과 함께 기록돼 있다. 이곳 사지에서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도자기류를 비롯해 어골문 계열의 복합문 기와가 고루 확인된다. 최근까지 기단석과 정초석들도 한군데 쌓여 있었지만, 현재 모두 유실되었다. 조선 시대의 보문사는 옛 제주목과 정의현을 오가는 길에 설치되어 동원(東院) 역할을 담당했는데, 절 주변을 김상헌의 〈남사록〉에서는 보문동, 〈탐라도〉에서는 보문촌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 혜일 선사의 시가 전해 온다.
절은 초라하니 거친 지경에 의지했으나(寺僻依荒訟)/샘물은 달디다니 꿈속에서 얻었네(泉甘得夢中)/ 연꽃 도량이 수승한 일을 맞았으니(蓮場逢勝事)/ 불법의 유풍이 이어졌음이라(佛?嗣遺風)/ 풀은 서리를 맞고도 그대로 푸르른데(草過霜仍푬)/ 담쟁이는 풍토병 때문인지 붉지 않구나(蘿因來未紅)/ 원통문이 스스로 열린 이곳에(圓通門自啓)/멀리 기러기가 넓은 하늘에서 울고 있어라(遠鴈叫長空)
혜일 선사는 고려 충렬왕 무렵인 1275년에서 1308년 사이에 제주를 노래한 최초의 인물로 시승이라 불린다. 선사는 전남 강진 백련사에서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한 원묘요새, 천인, 원완의 뜻을 이은 인물이다. 또한 선사는 몽고침략기 저항을 주도하였던 삼별초와 뜻을 함께하여 완도로 유배 온 이영의 숙부이기도 하다. 이때 완도 법화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사의 시는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탐라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때 원의 원종(1273)은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뒤 그 잔군 토벌과 항복민을 다스리기 위해 초토사를 두어 직접 관리를 파견했다. 원은 그 이전부터 탐라를 일본과 남송의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여기고 있다가, 삼별초의 항쟁을 계기로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고 초토사를 설치한 것이다. 이후 제주는 약 100년간 원의 직접적인 지배 속에 있게 되는 탐라총관부가 설치됐다.
탐라국은 동북아 전쟁이 몰아치는 전초기지였다. 혜일 선사는 그 광풍의 길목에서 작고 거친 오름 하나 기대고 있던 사찰 보문사를 노래하고 있다. 그곳은 탐라의 고단한 역사 속에서 도민들에게 달디단 생명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고해에 피어난 연꽃과 같이 삶에 위안이 되었던 사찰이었다. 그 시절 선사에게 저 오름에서 들려오는 꾀꼬리 울음은 자비 관음을 염송하는 목탁 소리와 다름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