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금의 스토리텔링 본생경] 12. 사신구사 본생담
호랑이에게 자신을 보시한 태자 자기 희생해 타인 구하는 ‘사신구사’ 기원 후 성립된 대승 본생담의 특징 굶주린 범에 자신 보시한 살타태자 돈황 막고굴 등에 벽화로 그려 전승 이차돈 순교 전 해당 본생담 전래돼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본생담(本生譚)은 인도에서 탄생 되었지만, 팔리어로 기록한 남전 장경과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한 대승 장경에는 서로의 경전에 수록되지 않은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기원후 성립된 대승 경전에 들어간 본생담들은 나를 희생하여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사신구사’(捨身求死)의 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중에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자신의 몸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보시한 태자의 이야기이다.
이 본생담은 〈고승 법현전(高僧 法顯傳)〉에 기록된 “축찰시라(竺刹尸羅, Taxila)에서 동쪽으로 이틀쯤 가면 스스로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인 곳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도 큰 탑이 세워져 있었고 모두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여러 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다투어 공양을 올렸으며 꽃을 뿌리고 등을 켜는 것이 계속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라는 내용을 통해서 추측해 볼 때, 탁실라 인근의 지역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석존이 전생에 마하살타(摩訶薩陀) 왕자였을 때, 굶주린 어미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에게 대비심을 발하여 자신의 전신을 보시한 이야기는 〈현우경(賢愚經)〉, 〈보살투신이아호기탑인연경(菩薩投身飴餓虎起塔因緣經)〉, 〈금광명경(金光明經)〉, 〈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육도집경(六度集經)〉, 〈경률이상(經律異相)〉, 〈법원주림(法苑珠林)〉,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 여러 경전 및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 경전에 실린 이 이야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현우경〉 권 1의 ‘마하살타이신시호연품’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주 오랜 옛날 잠부드이파에 큰 국가가 있었는데 국왕의 이름이 마하라다나이고 그는 작은 나라 5000개 이상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첫째는 마하부나영, 둘째는 마하데바, 셋째는 마하살타이다. 그중에서도 막내아들은 어려서부터 자비를 행하여 일체중생을 가엾이 여겼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과 부인 그리고 태자들을 데리고 동산 구경을 나갔었다. 왕이 피로하여 잠시 쉬고 있을 때, 세 아들은 숲속에서 놀다가 어미 호랑이가 새끼 두 마리에게 젖을 먹이려다가 주림을 못 견디어 자신의 새끼를 도로 먹으려는 것을 보았다. 법을 위해서 몸을 보시하기로 결심한 막내태자는 두 형을 먼저 보낸 후 호랑이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 앞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주린 호랑이는 입을 다물고 먹지 못하였다. 그때 태자는 날카로운 나무 꼬챙이로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내었다. 호랑이는 그 피를 핥다가 그제서야 입을 벌려 곧 그 몸을 먹었다.
두 형은 오래 기다렸으나 아우가 돌아오지 않아 그 자취를 따라 찾아가면서 조금 전에 나누던 아우와의 말을 생각하였다. “반드시 그 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언덕에 올라 마하살타가 호랑이 앞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호랑이는 벌써 그것을 먹고 있는데 피와 살이 낭자하였다.”
두 번째, 〈금광명경〉 권4 ‘사신품(捨身品)’을 요약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나간 세상에 마하라타(摩訶羅?)라는 임금이 있어, 선한 법을 닦으며 나라를 잘 다스려서 원수나 대적이 없었다. 이 임금이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몸매가 훌륭하고 위엄과 덕행이 놀라웠다. 맏태자는 이름이 마하파나라(摩訶波那羅)이고 둘째는 마하제바(摩訶提婆)고, 막내는 마하살타(摩訶薩댧)였느니라.
어느 날 이 왕자들은 동산을 노닐면서 구경하다가 차츰차츰 큰 대숲 속에 이르러 쉬고 있었는데, 범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범은 새끼를 낳은 지 이레가 되었는데, 일곱 마리 새끼들에게 둘러 싸여 먹을 것을 먹지 못하여 지쳤고 몸이 야위어서 머잖아 죽을 것 같았다.맏태자가 이 범을 보고 이 범은 새끼 낳은 지 이레가 지났는데, 일곱 마리 새끼에게 에워싸여 먹을 것도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다가 배가 몹시 고프면 반드시 저 새끼라도 잡아먹겠구나라고 말하였다.막내 왕자는 이제 이 몸을 버릴 때가 돌아왔음을 깨닫고 용맹한 결단으로 큰 원을 세웠으며, 훌륭한 자비심으로써 마음을 닦았다.”
〈현우경〉과 〈금광명경〉에서 살펴본 살타태자의 보시를 기록한 ‘사신사호 본생담’은 큰 줄거리는 같으나, 새끼 호랑이의 숫자가 두 마리 또는 일곱 마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455년에 투르판(高昌)에서 엮어진 〈현우경〉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먼저 전해졌으며, 〈금광명경〉은 중국 내륙을 중심으로 전파됐다.
먼저 〈현우경〉의 내용을 도해한 ‘사신사호본생도’는 3~8세기에 조영된 쿠차(庫車, Kucha) 지역의 키질 석굴 7·8·17·38·47·58·91·100·114·157·178·184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 4~5세기에 조성된 키질 석굴 38굴 ‘사신사호본생도’는 마름모 형태의 화면 상부에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살타태자가 그려져 있으며, 하부에는 땅에 떨어진 살타태자와 굶주려 뱃가죽이 등에 붙어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한 마리의 어미 호랑이와 두 마리의 새끼 호랑이가 태자의 몸을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키질 석굴처럼 〈현우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사신사호본생도’는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보협인탑(寶튒印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협인탑의 탑신부 사면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시비왕 본생도(尸毘王 本生圖)’, ‘수대나태자 본생도(須大拏太子 本生圖)’, ‘월광왕 본생도(月光王 本生圖)’와 함께 ‘사신사호 본생도’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석탑의 조각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탁본한 그림을 살펴보면, 오른쪽에는 절벽, 왼쪽에는 나무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살타태자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나무 꼬챙이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태자의 오른쪽 다리 앞에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어미 호랑이와 왼쪽에 마모가 되었으나 두 명의 새끼 호랑이가 표현돼 있다.
다음으로 〈금광명경〉의 내용을 도해한 사례는 돈황 지역의 막고굴(莫高窟) 석굴을 비롯하여 중국 내륙의 용문석굴(龍門石窟),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문수산석굴(文殊山石窟), 경양 북석굴(慶陽 北石窟) 등지에서 4세기부터 오대시기인 10세기까지도 꾸준히 석굴의 벽면에 도해 되어져 왔다.
특히 돈황 막고굴의 경우 9·55·72·85·98·108·138·146·154·231·237·254·299·301·302·417·419·428굴 등의 많은 굴에 ‘사신사호 본생도’가 현존하고 있어 해당 본생도의 유행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북주(北周) 시대에 그린 돈황 막고굴 428굴의 〈사신사호 본생도〉는 전형적인 중국식 표현기법으로 세 명의 왕자가 말을 타고 궁을 나와 숲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부터 살타태자가 자신의 몸을 굶주린 어미 호랑이와 일곱 마리의 새끼 호랑이들에게 보시하는 장면, 가족들이 막내 태자의 뼈를 보고 슬퍼하며 이를 탑으로 세워 공양하는 장면 등 사건의 흐름에 따라서 길게 서술식으로 도해되어 있다.
그리고 6세기에 제작된 일본의 법륭사(法隆寺) 옥충주자(玉蟲廚子)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화면 맨 위에 살타태자가 굶주린 어미 호랑이를 위하여 나뭇가지에 옷을 벗어서 걸어놓는 장면이 보인다. 화면 가운데 부분에는 언덕에서 떨어지는 태자를 그렸고, 아래쪽에는 자신을 굶주린 어미 호랑이와 일곱 마리의 새끼 호랑이들에게 보시하고 있는 태자가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사신사호 본생도’는 크게 두 가지의 형태로 도해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앞에서 살펴본 보협인탑 부조처럼 〈현우경〉을 소의 경전으로 한 경우와 옥충주자처럼 〈금광명경〉을 소의 경전으로 한 사례가 현존하고 있어 ‘사신사호 본생담’이 경전에 상관없이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흥법(興法)’의 ‘원종흥법 염촉멸신조’(原宗興法 厭觸滅身條)에 “염촉(이차돈)이 자신을 희생하여 중생들이 불법의 이익됨을 깨닫게 하려 하였다. 이때 왕(법흥왕)이 말하길 (과거에)스스로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서라도 일곱 마리의 짐승을 불쌍히 여겼다”라는 내용을 통해서 〈삼국유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이미 살타태자의 보시와 공덕행이 한반도에 전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