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 스님의 제주산방일기] 고난 함께한 유랑 승려
비췻빛 바닷길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면 요즘 핫한 제주의 밀라노라 불리는 월정리 마을과 연이어진 행원리 마을이 나온다. 카페가 즐비한 지금과는 달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래바람으로 살기 힘든 곳이었다. 고난이 있는 곳에는 위안하는 이가 있으니, 당에 좌정한 중의 대사다.
행원마을 아래 바닷가에는 다섯의 신이 좌정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중의 대사이다. 대사는 강원도 아버지와 철산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강원도의 절이 다 파손되었다.
대사는 배를 타고 홀로 제주로 왔다. 옛날 큰 항구였던 압선도(지금의 조천)에 배를 타고 들어와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뒷개(지금의 북촌) 정지폭낭 아래 백일 간 머물렀다. 동네에서 김첨추 영감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어 대사가 구경을 가니, 돼지를 딸린 국물에 소면을 말아 주었다. 이에 중의 대사는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여 다시 동쪽으로 떠났다.
월정 비석거리를 넘어 행원 청천이 동산에 도착하였다. 중의대사는 이곳 역시 낮에는 흙이슬, 밤에는 밤이슬을 내려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지만,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아 자리만 지켰다. 이때 오분작 할망이 구덕을 들고 나타나 인사하였다. 할망이 “어느 절당에 대사입니까”라고 묻자, 대사는 강원도에서부터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망이 중의 대사를 모시고 남당아래 문씨고냥 너븐돌에 가니 “함께 좌정하시지요”라고 했다.
가을이 돼 조와 밭벼쌀이 많이 달려 고개를 숙이고 잎새는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풍운이 조화롭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곡식이 모두 쓰러지고 피해를 보게 되어, 마을 어른들과 유지, 남녀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하는데, 한 사람이 “남당에 있는 대사에게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을 사람들이 가서 “이 조화를 풀어줍서”라고 간청하자, 중의대사가 조와 밭벼쌀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나무 채에 털어 돌방에 찍어서 돌래떡을 만들라, 그리고 10월 대보름날 상48단골 중38단골 하28단골의 집집마다 떡을 올려 제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니 농사가 잘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중기 이후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지나 불교 탄압이 심해지자 승려들은 피안의 거처를 찾아 중앙에서 먼 곳으로 떠돌다 제주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제주에서도 박해는 이루어지고 때마침 농사도 어려웠는 데 삼정은 문란했다. 이 삼정 가운데서도 백성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것은 환곡이었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면서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받아 생활을 더욱 고달프고 가난하게 했다.
이런 환경에서 승려들은 고난을 함께 했다. 이형상목사에 이르기까지 제주 전역의 사찰은 훼철되어 이렇다 할 승려의 거처와 대접이 없었다. 승려들은 소박한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한편 제주민들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척박한 땅과 변화무쌍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았다. 그래서 제주민들에게 의지하고 위안받던 승려의 거처는 당과 같이 여겨졌을 것이다. 여기 행원리 승려는 그들에게 돌래떡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바다의 변화를 알려주며 가난을 나누며 함께 이겨나가는 삶의 길잡이가 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