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골프채 브랜드’ 고집 30년… “한류 들뜨게 해” ‘신념무적’…위기때마다 매달린 인생 화두
양정무 랭스필드 회장(62) 1992년 국산골프채 ‘랭스필드’ 설립해 1993년 ‘공직자골프금지’로 위기 맞아 위기를 기회로, 동남아 시장개척 성공 2002년 세금폭탄으로 최종부도 처리 2005년 하와이시장 개척성공후 귀국 랭스필드 2005 부산APEC 공식클럽 주말마다 전국 고찰과 암자 등 찾아 위기때마다 108배 등으로 마음 수행 회문팰리스 집개조해 무차선원 열어
‘30주년’, 한 사람의 삶에서 30년이라는 시간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더욱이 그 시간을 오로지 하나의 일을 위해 썼다면 그 30년은 지나온 것이 아니라 쌓아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인 것이다. 지나간 것이 아닌, 쌓인 것의 가치는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쌓여 있는 시간. 그렇게 하나의 삶이 ‘삶’을 넘어 ‘역사’가 된 시간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30년 전, ‘국산 골프채’라는 명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미답의 길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 길을 걷고 있는 ㈜와이랭스필드의 창업주 양정무 회장의 30년을 들여다본다.
어느 날 찾아온 목표, ‘국산 골프채’
“제가 미국서 잠깐 공부할 때 골프를 처음 하게 됐는데, 그땐 젊을 때고 골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제대로 된 골프채 하나 없이 골프를 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생활을 할 때였는데, 제대로 된 골프채를 하나 마련하려고 유명 백화점에 가서 국산 골프채를 찾았는데 국산 골프채가 없더라고요.”
양 회장이 모 일간지 광고부에서 영업업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국산 골프채는 없다는 매장 직원의 어이없다는 듯한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는 순간 양 회장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골프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였다. 골프는 ‘사치’처럼 느껴질 때였다. 골프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였고 골프시장의 변방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렇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지만 양 회장은 국산 골프채가 없다는 사실에 생각 한 구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평소 ‘우리’, ‘우리 것’에 대한 소신이 남달랐던 양 회장에게 국산 골프채가 없다는 사실과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적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렇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양 회장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을 그는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애꿎은 매장 직원과 실랑이를 하고 나온 양 회장은 그때부터 마음속에 ‘국산 골프채’를 화두로 품었다.
미다스의 손
양 회장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삼십대 초반의 젊은 시절에 당시 광고영업 분야에서 하루하루 신화를 쓰고 있었다.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매출의 수치를 매일매일 갈아치우고 있었다. ‘최연소 차장, 과장, 부장 … ’, 어느 날부턴가 양 회장 이름 앞에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당연히 수식어가 그냥 생긴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영업에 임했다. 그리고 늘 남다른 생각으로 살았다.
“광고영업을 하다 보니까 다양한 회사와 다양한 일들을 접할 수 있었어요. 많이 볼 수 있었던 거죠. 어느 날, ‘출판’이 보였어요. 아, 저거 ‘사업’ 되겠다싶었어요. 그래서 그날로 거래처 지인의 도움을 받아 작게 출판사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사업은 대성공이었죠.”
‘영업’이라는 특수성이 양 회장의 안목을 넓혔고, 타고난 영업적 마인드와 사업가적인 DNA에 그 안목이 더해졌다. 광고영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그는 사업가로서의 눈을 뜨기 시작한다. 양 회장은 신문사 광고영업 업무와 사업을 병행하며 자신이 처음 시작한 사업을 하루하루 키워나갔다. 양 회장이 사업에 남다르게 매진한 이유는, ‘국산 골프채’였다. 양 회장 사업의 최종 목표는 ‘국산 골프채’였다. 국산 골프채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양 회장은 출판을 시작으로 다양하게 사업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승승장구였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대박’이었다.
국산 골프채, 랭스필드
“일본 골프채의 헤드(우드)를 우리나라에서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렴한 값으로 헤드부분을 우리나라에서 OEM으로 제작해 자국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다시 우리나라에 비싼 값으로 팔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우리는 그런 골프채를 쓰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아무도 그런 사실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민하지도 않았어요.”
1992년 드디어 ‘국산 골프채’가 명사화된다. 국산 골프채 브랜드 ‘랭스필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양 회장은 그동안의 사업으로 자금을 모아 법인 ‘성해무역’을 세우고 브랜드 ‘랭스필드’를 세상에 선보인다. 같은 시기에 유사한 브랜드들이 같은 시도를 했지만 앞서나간 것은 랭스필드였다. 양 회장은 몸담았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전념한다.
양 회장은 국산 골프채 ‘랭스필드’ 1호 매장을 서울 인사동에 열었다. 인사동은 우리 문화의 색깔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상징적인 장소인 것이다.
랭스필드의 1호 매장이 인사동점이라는 것은 양 회장의 자존심이었다. 앞서 말했듯 평소 ‘우리 것’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던 양 회장이었다. 양 회장은 2019년 일본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가 시작된 뒤 ‘No재팬’ 광고를 게재하는 등 국민적 정서를 이끄는 데 앞장섰다. 또한 수십 년간 고조선 관련 유물을 수집해 ‘고조선역사박물관’을 세우고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일제 등 수입 중고 골프채를 랭스필드 신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랭스필드의 1호 매장을 인사동에 마련한 것은 그런 양 회장의 ‘우리 것’에 대한 신념의 발로였다. 골프채의 중요 부분을 수출하면서도 일본 브랜드의 골프채를 비싸게 사서 써야했던 시절에 다짐했던 자존심의 실천 같은 것이었다. 양 회장은 “한국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우리의 문화를, 스포츠 문화를 꽃피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양 회장에게 남은 일은 랭스필드를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신념무적, 시련 앞에서
“창업한 이듬해였어요. 물건 만들고 홍보하고 물건 팔러 다녀야 할 때에 날벼락을 맞았어요. 정부에서 ‘공직자 골프 금지령’을 내렸어요. 정부에서 그런 정책을 발표하니까 골프 시장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요. 신생 업체인 랭스필드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죠.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위기부터 맞은 거죠. 시작을 절망에서 시작했어요. 급기야 직원을 20명으로 줄여야 했고, 생산은 아웃소싱으로 전환해야 했어요.”
당시는 ‘골프’라는 말 자체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일반화’가 안 된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골프라는 말 속엔 안 좋은 이미지가 있었다. 골프채를 비롯해 고가의 용품과 골프장 회원권 등이 청탁의 뇌물로 이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골프’ 자체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국산 골프채 랭스필드는 출발선에서 뛰어보지도 못하고 넘어졌다.
‘신념무적’, 양 회장의 발길이 서울 삼각산 도선사 앞에 멈춰 섰다. 도선사 도량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문구다. 양 회장은 지금도 ‘신념무적’이라는 이 문구를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두고 산다. 양 회장은 새벽까지 부처님 전에서 기도했다. 부처님께 매달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자신을 자신의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기 위한 다짐의 기도였다.
‘신념무적’, 마음을 가다듬은 양 회장은 다시 길 위에 섰다.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일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양 회장은 1994년부터 해외시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고 바로 해외로 나갔다.
“우선 일본도 가고 동남아도 가고, 골프 강국인 미국도 갔어요. 나라마다 벽은 높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해외 지사를 설립하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어요. 뛰어다니는 일은 제 전공이잖아요. 다시 ‘양정무’를 발휘할 때가 온 거죠.”
그랬다. 벽은 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넘지 못할 벽은 없었다. 양 회장은 동남아를 시작으로 해외 골프시장에 ‘랭스필드’를 심기 시작했다. 빈 논에 모를 심듯이 랭스필드를 한 줄 한 줄 심기 시작했다. 양 회장은 현지 골프장부터 돌기 시작했다. 랭스필드를 들고 세계 명품 브랜드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행사를 만들어 국내 처음으로 ‘골프 투어’ 상품을 만들었다. 골프장마다 랭스필드 골프채를 렌트 채로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계획은 매출로 이어졌다. 투어 상품은 매일 전세기를 띄우게 됐다. 다각도의 전략으로 랭스필드는 매출과 브랜드 이미지 모두 수직 상승했다. 시련과 위기가 기회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심었던 모가 자라 논을 채우기 시작했다. 랭스필드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40여 개국의 시장을 열었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골프채 사업에 뛰어들었던 국내 기업들이 모두 시장에서 철수했지만 랭스필드는 확실한 ‘국산 골프채’로 남았다. 양 회장은 창업 이후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해 신제품을 연이어 내놓으면서 국내는 물론 동남아 등 해외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수출 실적이 연간 100만 세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게 ‘국산 골프채’를 실현한 양 회장은 1998년 ‘신지식인 2호’에 선정됐다.
다시 시련, ‘부도’
2002년, 양 회장은 경주 분황사로 가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양 회장의 발걸음은 무겁고 또 무거웠다. 길을 찾지 못해 가는 길이었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부도였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일이었어요.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길이 없다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부도의 과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었어요. 부실한 경영으로 인한 부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2002년 4월 26일, 잘 나가던 랭스필드는 최종부도를 맞는다. 흔히들 말하는 ‘흑자부도’였다. 부도가 나기 얼마 전에 양 회장은 세금 관계로 세무당국과 마찰이 있었다. 그 일로 국세청 간부 몇 명이 징계를 받았다. 문제는 징계를 받았던 간부들이 징계를 벗고 다시 원위치로 복귀하면서 벌어졌다. 괘씸죄였다. 5년 전에 유예했던 특별소비세를 한꺼번에 납부하라는 것이었다. 양 회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세무당국이 말하는 ‘유예’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당시에 세금을 모두 납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수증이었다. 양 회장은 영수증을 찾을 수 없었고 납부를 증명할 길이 없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는 매출의 수치가 대부분 외상매출이라는 것이었다. 세금을 납부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특별소비세는 매출이 발생하면서부터 세금이 발생한다. 쉽게 말해 실제로 수금되지 않은 매출을 수입으로 보는 것이다. 수입은 없는데 세금은 내야하는 것이다. 수금으로 이어지지 않은 허수의 매출을 세금은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 기업경영의 어려운 문제였다. 랭스필드의 매출이 너무 많다는 것이 오히려 악제였다.
일본 브랜드를 비롯해 수입 골프채가 장악한 우리나라 골프채 시장에서 적지 않은 수입대체 효과를 창출하고 수출로 인한 외화수입에 일조했던 건실한 벤처기업 랭스필드는 ‘세금(특별소비세)’이라는 핵폭탄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당시 랭스필드는 계열사를 포함해 직원이 1천여 명 규모였다.
“최종부도가 난 다음날 분황사로 갔어요. 막막했죠.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고 길도 없고. 길은 없는데, 그래도 가고 싶은 길은 있었어요. 절이었어요. 신문사에서 영업일을 하던 때부터 주말이면 절에 갔어요. 아마 전국의 큰 절 작은 절 거의 다 가본 것 같아요. 영업 일이라는 게 하다보면 남들은 모르게 가슴 아플 때가 많아요.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남들의 부러움을 많이 받았지만 혼자 힘들었던 것들도 많았어요. 그때마다 마음 가는 절에 가서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상처들 씻고 오곤 했죠.”
양 회장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불심을 보면서 자랐다. 양 회장의 양친은 가을추수를 하고나면 거둔 곡식을 반드시 불전에 먼저 올렸다. 양 회장은 사무실 한 편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고, 현재 운영하고 있는 포천 회문팰리스 안에는 거주하던 집을 개조해 법당 무차선원을 열었다.
희망의 불씨, 하와이
양 회장은 경주 분황사에서 영덕에 있는 장육사로 자리를 옮긴다. 분황사 스님이 소개한 영덕사는 휴대폰도 수신되지 않는 세상의 ‘밖’이었다. 양 회장은 일주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백팔배도 하고 천배도 하면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 앞날을 생각했다.
양 회장은 다시 길을 찾아 나선다. 골프의 강국 미국이었다. 워싱턴과 뉴욕, 캘리포니아를 거쳐 하와이에 닿았다. 하와이에 거점을 만들기로 했다. 미국 시장 역시 언젠가는 도전해야 할 숙제였다. 역시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본격적으로 랭스필드를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 기회라고 생각했다. 랭스필드의 모든 것을 다 빼앗겼지만 다행히 ‘랭스필드’ 브랜드는 양 회장이 유지할 수 있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양 회장은 하와이에 한국 절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와이 무량사. 양 회장에게는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닿은 이국땅 하와이. 단순히 관광이나 왔다면 혈혈단신이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새로운 길 위에 선 양 회장에게 이국땅은 외로운 길이었다.
“그 먼 곳에서 한국 절과 스님을 만난다는 게 신기했고 정말 다행스러웠죠. 큰 힘이 됐어요. 일하면서 틈틈이 절을 찾았어요. 고요한 법당에 앉아 부처님을 뵈었죠. 흔들리던 마음 다시 고쳐 잡고 ‘내일’을 준비했어요.”
양 회장은 다시 발로 뛰었다. 어렵게 중국 공장을 통해 공수해 온 골프채 50세트로 시작했다. 랭스필드 ‘1세트’를 시작으로 랭스필드의 역사는 하와이에서 다시 시작된다. 1세트가 2세트, 3세트가 되고 매장이 생겼다. ‘랭스필드’라는 모를 하와이에 심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국에서 공수해온 50세트를 모두 팔았다. 마진율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좋았다. 100세트, 200세트, 매출은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20평짜리 매장은 70평으로 넓어졌다. 양 회장은 하와이로 건너간 지 2년 만에 재기에 성공한다. 2005년 양 회장은 서울로 돌아와 국산 골프채 ‘랭스필드’를 다시 시작한다. 랭스필드는 2005년 부산APEC 공식 클럽으로 선정된다.
“랭스필드가 30주년을 맞습니다. 30년, 한 세대가 지나간 거죠. 이제 새로운 30년을 준비해야죠. 제2의 창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델도 기획하고 있고, 회사 운영에 대해서도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시대잖아요. 특히 기업이 성장하고 살아남는 일은 더욱 어려운 시절이 됐어요. 랭스필드는 great, 큰 회사가 아닌 good, 좋은 회사로 남고 싶어요. 명품회사, 30년 전 모델도 A/S 해주는 회사, 늘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 왼손 채 만드는 회사, 태극마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회사가 되고 싶어요.”
양 회장은 랭스필드가 단순히 골프채를 파는 것이 아니라 100년 기업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우리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대에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 더구나 ‘내 것’, ‘우리 것’을 지킨다는 것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키지 못하면 힘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한류’라는 명사가 우리를 들뜨게 하고 있다. ‘우리 것’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고 뿌듯한 일이다. 그리고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양 회장은 ‘국산 골프채’라는 명사를 이제 ‘한국 골프채(Made in Korea)’라는 명사로 만들기 위해 다시 뛰고 있다. ‘랭스필드’라는 이름은 이제 우리끼리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불러야 할 이름인 것이다. 언젠가 모든 골프채의 이름들 맨 앞에 ‘랭스필드’가 보이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