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란? 무아를 단박에 깨침이다
20. 돈오 세계 유행 수행법은 점수 돈오 수행의 가치 희소해 단계별보다 ‘단박’ 장점지녀
선(禪)에서는 깨달음을 단박 깨침, 돈오(頓悟)라 한다. 다른 말로는 직지(直指),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다.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란 누구인가? 깨어난 이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중도, 팔정도, 사성제, 무아를 깨달았다.
우리도 깨달을 수 있는가? 부처님은 누구나 깨달음의 성품인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으니 마음을 닦아 깨치면 부처가 되어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대자유를 누린다고 하셨다.
부처님의 설법을 모아놓은 팔만대장경에서, 초기경전에 근거한 남방 상좌부 불교와 대승 교학에서는 일반적으로 깨달음의 길을 계정혜 삼학 수행을 하여 세세생생 닦아 아라한과 또는 부처가 된다고 한다. 즉, 번뇌망상을 지닌 중생이 금생 뿐아니라 윤회를 거듭해서 닦아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한 - 아라한과를 이루는 4단계 또는 9단계나 대승 〈화엄경〉처럼 52계위를 차례로 닦아 완성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선의 깨달음, 돈오(頓悟)
그런데 선(禪)에서는 깨달음을 단박 깨침, 돈오(頓悟)라 한다. 다른 말로는 직지(直指),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된다’ 하거나 ‘한 번 뛰어 여래의 지위에 바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선(禪)에서는 돈오, 직지, 일초직입여래지라 할까? 6조 혜능대사는 〈육조단경〉 ‘돈오(頓悟)’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지식아, 나는 홍인화상 회하에서 한 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쳐(言下大悟) 진여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단박에 깨달아(頓悟) 각자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 성품을 단박에 깨닫게(頓悟) 하련다.”
이 혜능대사의 법문에 선종의 깨달음, 돈오에 대한 설명이 잘 드러나 있다. 혜능은 스승의 〈금강경〉 설법을 듣던 중 크게 깨달아 자기 성품이 무아라는 것을 단박에 보았다. 자기가 본래 무아라는 것을 찰나 간에 깨치고 이 무아의 가르침을 후대에 널리 전한 것이 돈오선(頓悟禪)이다.
돈오선을 조계선(曺溪禪)이라고도 하는데, 6조 혜능대사가 주석한 조계산에서 천하에 전파된 선(禪)을 말한다. 대한불교조계종과 조계사 이름이 바로 이 조계 혜능대사의 돈오선에서 유래한다.
돈오선의 혜능과 점수(漸修)의 신수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선종의 6조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 인물은 혜능과 신수다. 안타깝게도 한국과 일본의 일부 불교학자들은 아직도 선종의 6조를 혜능이 아닌 신수라 주장하고 있다. 선문(禪門)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금 한국, 중국, 일본 선문에서 신수대사를 6조로 추앙하고 참선하는 도량은 어느 곳도 없다. 왜 그런가? 실참을 중시하는 선사들은 신수대사를 선의 종지를 깨친 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수는 깨달음에서 점수(漸修)를 주장했다. 즉 우리를 중생으로 본다면 중생이 세세생생 닦아서 마침내 부처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런 점수설은 교학의 입장과 다를 바 없었다. 신수의 점수설에는 선종의 정체성, 특색인 돈오가 없다. 선종의 종지를 잃어버리고 교학으로 치중해버린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혜능 대사는 돈오선을 주창했다. 누구나 깨달음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찰나간에 깨치면 부처가 된다 하니 깨달음에 가장 빠른 최상승법을 일러준 것이다. 이것이 禪이다. 혜능은 무지한 나무꾼 출신의 행자에 불과하였으나 스스로 깨달음의 지혜가 본래 갖춰져 있다는 것을 믿고 찰나간에 깨치고 그 길을 알려주었다. 깨달음을 향해 출가한 수행자들은 혜능의 단박 깨치는 선에 열광하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신수 대사의 점수법은 2대에 이어 3대 제자에 가면 법맥이 흐지부지 되어 끊어져 버렸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서울 잠실의 123층 건물이 있는데 그 꼭대기 전망대까지 올라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계단을 통해서 걸어서 123층을 올라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1층에서 초고속 엘레베이터를 타고 단번에 123층에 오르는 길이다. 어떤 길로 갈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의 몫이겠지만, 대다수는 단번에 가는 길로 간다. 깨달음의 길도 이와 같다. 선(禪)은 123층까지 단번에 오르는 길이고, 점수는 계단으로 걸어서 123층에 오르는 것과 같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와 대승 교학도 점수의 수행관이니 계단을 통해서 오르는 이치와 같다. 오직 돈오를 주창하는 선만이 단박에 깨치는 길을 제시하니 당시나 지금이나 선의 가치는 저 하늘의 밝은 해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돈오하지 못했다면 선지식을 찾아가라
조계의 돈오선은 무아를 단박에 깨달아 부처되는 길을 제시한다. 만약 무아를 바로 깨치지 못하면 선지식을 찾아가 지도를 받아 자기가 무아임을 깨치라 한다.
그럼 선지식(善知識)은 누구인가? 과연 어떤 이를 선지식이라 하는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바른 길임을 알고 바로 보여주는 분이 선지식이다. 최상승법이란 깨달음의 가장 빠른 길이다. 선(禪)은 단박 깨치는 돈오를 말하니 최상승법이다. 선지식이란 최상법인 선(禪), 돈오, 직지를 바로 알고 보여주는 분을 말한다. 123층 꼭대기 전망대를 올라갈 때 둘러가는 계단 길이 아닌 엘레베이터 길을 바로 알려주는 분이 선지식이다.
누가 선지식인지 알려면
그런데, 요즘은 너도나도 깨달았다고 견성했다고 말하니 누가 선지식인지 알기가 참 어렵다. 지금 우리 불교계에 적지 않은 혼란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123층을 바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길을 모르고 계단 길이 바른 길이요, 빠른 길이라 잘못 알고 그런 길을 알려주는 이를 선지식으로 삼아 공부하면 평생 고생만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상승법의 바른 길을 알려주는 선지식을 만나려면 스스로 바른 안목인 정견을 갖춰야 한다. 만약 자기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눈앞에 선지식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그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불제자라면 불교의 근본교리인 중도, 팔정도, 무아, 공을 공부하여 바른 안목인 정견을 세워야 한다. 불교의 정견이 서게 되면 누가 부처님 법에 의거하여 법을 설하는지? 누가 부처님 법이 아닌 ‘내가 있다’는 입장에서 아상을 세우는지 알아보는 안목을 갖추게 된다.
불교는 역사가 오래되고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법문이 다양한 언어로 설해져 다양한 사상과 이론이 펼쳐져 있다. 때문에 불교 공부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불교는 중도, 팔정도, 무아가 근본이다. 불교의 근본 교리에서 벗어난 법문이나 강의는 외도이다.
선(禪)도 마찬가지다. 선(禪)은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를 말과 문자를 떠나 체험, 실천하는 것이나 그 행이 중도, 팔정도, 무아의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삿된 외도가 되는 것이다. 선의 깨달음 돈오도 결국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음이다.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깨침이다.
까닭에 불교의 지혜로 대자유로 가려는 불자라면 반드시 중도연기, 팔정도, 무아의 근본교리를 바르게 공부하여 정견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깨달음의 길에서 선지식의 중요성
여행이나 낯선 곳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고 헤맨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길도 마찬가지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해탈하려면 깨달음을 이루어야 하는데, 깨달음의 길을 잘못 가면 방황하게 된다. 어떤 이는 거꾸로 가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을 바르게 일러주는 선지식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선의 본래성불, 최상승, 돈오의 깨달음을 체득하고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은 매우 희유하고 고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부터 선지식을 만나기 위해 6조 혜능대사처럼 머나먼 길을 갔을 뿐 아니라 달마대사를 만나기 위해 2조 혜가대사는 스스로 팔을 자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도 돈오선을 깨치려면 선지식을 찾아 불교와 깨달음의 길을 묻고 지침을 받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제방 총림과 선원의 방장, 조실, 유나, 선원장 스님이라면 능히 선의 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만약, 아직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간절히 선지식 인연을 기도하면서 차선책으로 경전과 조사어록을 선지식 삼아 공부해 나가는 것도 한 방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선지식, 정견을 세우는 것이다.
돈오를 종지로 하는 한국선의 가치
한국선은 본래성불과 최상승 돈오선인 바 조사 간화선의 종지종풍을 가장 바르게 전승하고 있다. 비록 선이 중국에서 발화하였지만, 중국은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며 안타깝게도 선맥이 단절되었다. 일본의 선은 돈오의 종지에서 벗어나 화두를 하나하나 단계별로 타파하는 사다리 참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남방불교 위빠사나도 점수법이고, 티벳불교 역시 인과법문 위주의 점수법을 말한다.
오직 한국선이 중도 정견과 본래성불, 그리고 돈오를 제창하고 있으니 그 가치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문명사적 위기와 경제적 정치적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도를 바탕으로 직지, 돈오 선풍의 한국선이 대안으로 부각될 날이 올 것이다. 문제는 한국 선 수행자들이 그럴 지혜와 능력을 닦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