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 모양 아니라 마음 흔들리지 않는 것

18. 좌선 좌선의 참뜻은 ‘禪定’이고 중도의 마음을 밝히는 것 ​​​​​​​좌선 익힌 후 動中공부를

2021-10-29     박희승
▶ 한줄 요약
참선의 방법 중 하나인 좌선은 앉은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질을 향한 끝없는 집착과 갈망을 비워 본래 갖춰진 마음을 밝히는 것이 참선이고 좌선이다. 

 

좌선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다. 앉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되며, 좌선만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선하면 좌선(坐禪)이 떠오른다. 좌선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다. 고요한 산사나 선방에서 가부좌하고 마음 공부하는 것을 참선이라 말한다. 참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참선하면 좌선을 생각하기 쉽다. 실제 사찰의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佛像)도 대체로 좌선한 모양이 일반적이니 그렇게 보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요즘 참선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도 좌선하지 않으면 참선하지 않는 것으로 보니 그 말이 맞다고 할 것이다. 과연 좌선만이 참선인가? 좌선이란 무엇인가?

〈육조단경〉의 좌선이란?

선종(禪宗)의 종전 〈육조단경〉에서는 ‘좌선(坐禪)’을 이렇게 말한다.

“좌선이란 무엇인가? 일체 걸림이 없어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6조 혜능대사가 말한 좌선은 앉는 모양이 아니라 마음이 안과 밖으로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어 있음을 말한다. 우리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어 버린다. 참선하면 앉아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하는 좌선을 떠올리는 우리의 고정 관념을 부수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그러니 좌선은 앉은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6조는 좌선을 말하고 이어서 선정을 말한다.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만약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청정하고 스스로 정하다.”

6조 대사는 좌선과 선정을 같은 뜻으로 말한다. 우리는 좌선이라는 말에 집착하여 좌선을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라 오해하는데, 실제 좌선의 참 뜻은 선정으로, 밖으로 경계에 머물지 않고 안으로 안정된 삼매를 말한다.

우리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고 스스로 정하다”는 말씀이다. 좌선과 선정은 본래 청정하고 정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본래 청정, 본래 성불, 본래 부처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좌선해서 선정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선정이 갖춰져 있으니 오염된 번뇌망상만 비우면 본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참선을 바르게 잘 하려면 이 ‘좌선’의 참 뜻을 바로 알아 정견을 갖춰야 한다.

좌선은 일상생활서 중도지혜를 밝힘

6조가 말하는 좌선은 마음이 밖으로 물질이나 모양에 집착하여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 안정됨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좋은 집, 좋은 차, 보물이나 많은 재산에 집착하여 밖으로 밖으로 부귀영화를 쫓고 행복을 찾는다. 현대 사회와 같은 자본주의 제도에서는 이런 물질에 대한 욕망이 더 조장되는 시대이다. 온갖 광고가 물질에 대한 소비 욕구를 자극하고 이를 통해 사회경제가 작동한다. 특히 근래 우리 사회에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수도권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중생의 물욕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남시 대장동 부동산 개발사업을 둘러싼 끝 모를 온갖 추문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얼마나 재산에 집착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기득권을 가진 권력자들과 일부 법조인들이 결탁하여 끝없이 밖으로 물욕을 추구한다. 우리 사회의 최고 지식인 집단이 보여주는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망신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은 마음을 깨치고는 밖으로 물질에 집착을 멈추고 안으로는 늘 안정되어 평생 무소유로 흔들림 없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셨다. 6조 조계 혜능 대사 역시 ‘소욕지족(少欲知足)’을 말씀하셨다. 적은 욕심에 만족을 알라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현대인들의 물질적 소유의 끝없는 욕망이 행복의 길인지 의문을 가지고 불교의 무소유에서 행복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닐까?

6조가 말하는 좌선은 곧 바른 행복의 길을 말한다. 즉 마음 밖으로 물질과 재산을 추구하는 끝없는 욕망을 멈추고 내 마음 안에서 찾는 행복을 말한다. 이것을 비움의 행복이라 하겠다. 내 안에 물질을 향한 끝없는 집착과 갈망을 비우고 비워 본래 다 갖춰진 마음을 밝히는 것이 참선이고 좌선이다.

결론적으로 참선을 좌선으로만 보는 견해가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선, 또는 앉아서 하는 좌선은 앉는 모양이 아니라 마음이 안팎으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선, 좌선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좋다-나쁘다, 많다-적다, 물질-비물질 등의 분별망상을 비우고 일상생활에서 중도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

유마거사가 말하는 좌선

부처님 당시 깨달음을 인가 받은 재가 수행자로 유마 거사가 있었다. 수많은 불경 중에 〈유마경〉은 〈승만경〉과 함께 재가자의 설법을 모아 놓은 경전이다. 이 〈유마경〉에 좌선과 관련한 유명한 대목이 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인 사리불이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자 유마거사가 찾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사리불이여, 앉아 있다고 해서 좌선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좌선이란 생사 윤회하는 삼계(三界)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을 없앤 무심한 경지의 선정에서 나오지 아니하고서도 온갖 위의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법을 버리지 않고서도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으로 응집된 고요한 상태에도 탐닉하지 않고 밖을 향하여 혼란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좌선하는 사람이라면 부처님께서 인가하실 것입니다.”

유마거사의 이 말에 불교의 좌선에 대한 정의가 잘 정리되어 있다. 앉아서 참선한다고 다 좌선이라 할 수 없다. 〈육조단경〉과 같은 입장이다. 불교에서 좌선은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4고(四苦, 생로병사의 괴로움)와 8풍(八風, 이익과 손해, 명예와 폄훼, 칭찬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의 여덟 가지 바람)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여여한 것이 좌선이다. 부처님 당시의 유마거사나 선종의 6조 혜능대사의 법문에서도 좌선의 뜻은 하나인 것이다.

좌선에 집착함도 좌선의 효용을 부정함도 옳지 않다.

6조가 말한 좌선은 앉아서 하는 참선이 아니라는 것을 〈육조단경〉과 〈유마경〉에서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참선 수행자들은 앉아서 하는 좌선을 중시할까? 누구라도 좌선해서 물질에 집착을 떠나 마음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 시대에 마음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밖으로 향하는 몸과 마음을 앉아서라도 멈추고 비우는 좌선의 방편을 통해 수련하는 것이다.

선문(禪門)에서는 초심자들이 처음 참선할 때 좌선을 통해서 공부의 힘을 키우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아무래도 선에 갓 입문하는 이들은 들뜨고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단정히 앉아서 내면을 주시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좌선을 통해서 참선하는 힘을 키운 다음 움직이면서 하는 동중(動中) 공부로 나아가라 한다.

그러나 좌선을 하더라도 앉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좌선에만 집착하거나 좌선만이 깨달음의 길이라는 입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앉는 것을 목적으로 앉아서 하는 좌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니 중도가 아닌 양변이다. 혹여 선문에 이런 가르침을 아직도 행하고 있다면 엄중히 경책해야 한다. 화두 참선법을 제창한 대혜선사는 〈서장〉에서 “고요히 앉아서 깨달음만을 기다리는 이들을 묵조사사배(?照邪師輩)”라 하여 삿된 가르침을 베푸는 무리들이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좌선에 집착하거나 좌선만이 깨달음의 길이라는 주장도 잘못된 사견이지만, 또한 선원 수행자를 향하여 “좌선병이 걸렸다”하거나 “좌선 일변도 수행만으로는 못 깨닫는다”라는 등등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행위도 문제다.

산중 선원에서 안거 결제 기간에 산문 출입을 금하고 오직 참선하며 깨달음으로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모욕이나 다름없다. 출가하여 바른 수행과 전법하지 않고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는 행을 비판해야지 안거 결제에 충실한 본분 수행자를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고 편향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승가 안에 스며드는 세속적인 물욕과 사치 향락행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 떠나 안거 결제의 빛나는 수행 납자들을 격려 존중하면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 선원에서도 좌선 위주의 안거 문화를 성찰하면서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하는 선원도 있다. 용문산 상원사 선원은 안거 중에 좌선 정진 외에 동중 공부를 1시간 이상 일과로 한다. 동중 공부는 도량 청소나 잡초 뽑기 등을 하면서 화두 참구를 하는 것이다. 또한 결제를 마칠 무렵에 사찰 인근의 이웃 노인들에게 도시락 배달과 위로 방문을 하여 안거 공부를 회향하는 것도 의무화하고 있다.

이처럼 앉아서 하는 좌선 위주의 참선도 변화가 필요하다. 먼저 부처님이 깨친 중도 정견을 갖추고 좌선과 행선을 병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리이타의 인간 완성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