僧匠 색난 조성 불상·진관사 태극기 ‘보물’ 지정

문화재청 10월 25일 지정 공고 덕림사 등 4곳 불·보살상 대상 색난, 17세기 후반 대표 佛母 솜씨 뛰어나 조묘공·교장 별칭 진관사 태극기 항일유산 가치 커 함께 발견 등도 ‘중요’

2021-10-26     신성민 기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색난 스님의 작품 4점. 사진 위에서부터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조선 후기 활동했던 승려 장인 색난 스님의 대표작과 불교 항일유산 진관사 태극기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조선 17세기 조각승으로 이름을 떨친 색난(色難) 스님이 만든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진관사 태극기등 태극기 유물 3건을 포함한 총 7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1025일 밝혔다. 한 스님 장인의 대표작들이 일괄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색난 스님은 17세기 후반 활동한 대표 조각승으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관련 기록을 통해 1640년을 전후로 출생해 1660년대 수련기를 거쳐 1680년 수조각승(首彫刻僧)이 되어 전라·경상 지역에서 40여 년 동안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색난 스님은 동시기 조각승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유명 조각승이 평생 10건 내외로 작품을 남긴 것에 비해 색난 스님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여건에 이른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색난이 만든 불상을 선호했고 그의 조각 기술을 높이 평가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색난 스님은 솜씨가 뛰어난 장인이라는 뜻의 교장(巧匠)’, ‘조묘공(彫妙工)’으로 불렸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색난 스님의 작품은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이다.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지금까지 알려진 색난 스님의 작품 중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발원문을 통해 수조각승으로 활동한 40대인 1680(숙종 6)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으며, 26구로 구성된 대규모 불상이다.

실재감 있는 얼굴 표현과 넓고 낮은 무릎, 귀엽고 큰 얼굴에 크게 강조된 코의 표현 등 안정되고 아담한 조형미를 추구한 초기 제작경향을 보여준다.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은 능가사 응진당에 봉안돼 있는 불상 일괄로,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16856월 전라도 홍양현 팔영산 능가사 승려 상기(尙機)가 발원했고, 색난 스님이 수조각승으로서 그의 동료·제자들과 함께 주도해 조성했음이 확인됐다.

고흥 능가사는 색난 스님의 본사이자 활동의 본거지로서, 이곳의 응진당 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은 그가 오래도록 머문 사찰에서 대단위 불사를 진행하고 남긴 작품이라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1687(숙종 18) 제작돼 김해 신어산 서림사 시왕전에 봉안된 불상이다. 서림사 시왕전은 현재의 은하사 명부전을 의미한다. 은하사 명부전 존상은 모두 21구로,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귀왕, 판관, 사자, 금강역사 등 거의 완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 불상은 경상도 최동부 지역인 김해 지역에 조성된 작품으로서, 주로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색난 스님의 활동 영역을 파악하는데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색난 스님이 수조각승으로 조성한 명부전 불상 일괄은 대략 4건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광주 덕림사 불상과 더불어 색난 스님의 명부전 불상 중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경북 예천 학가산에서 화엄사로 온 계파 성능이 장육전(현 각황전)을 중창한 후 1703년 조성한 대형 불상으로, 색난 스님의 50대 만년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현재 불상에 재복장된 발원문에 의해 7존의 불보살상은 1703104일에 수조각승 색난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인 충옥(沖玉), 일기(一幾) 24명의 조각승이 협업해 만든 사실이 확인된다

문화재청은 보물로 지정된 4건의 작품은 관련 자료를 통해 조성시기와 배경, 제작자를 명확하게 알 수 있고, 동일작가 작품 중 대표성과 상징성이 있다는 점에서 지정 가치가 충분하다고 지정 사유에 대해 설명했다.

보물로 지정된 서울 진관사 태극기.

이와 함께 광복 제76주년을 맞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20095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 안쪽 벽체에서 발견됐다. 당시 태극기는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발견된 신문류는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 <신대한(新大韓)> <독립신문> 5종이다. 이들 신문들이 191966일부터 12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태극기를 숨긴 인물로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 스님을 주목하고 있다. 백초월 스님은 3.1만세운동 직후 비밀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불교계의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제공하는 등 국내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인물이다.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됐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현재 1919년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은 “‘진관사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형태상으로도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부분과 4괘를 검정색 먹물로 덧칠해 항일 독립의지와 애국심을 강렬하게 표현했으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라는 점에서 항일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