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되지 못할 인연은 없어
30. 상불경보살의 인사말
최초의 위음왕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정법이 없어지고 상법의 세상에서 잘난 체하는 비구들이 큰 세력을 이루더니, 그때 상불경이라는 이름의 한 보살비구가 있었느니라.
득대세보살이여, 그 무슨 인연으로 이 보살비구 이름을 상불경이라 했는가 하면 이 비구는 만나는 사람에게 그가 비구건 비구니건 우바새건 우바이건 간에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느니라.
“나는 그대들을 깊이 존공하며 감히 가벼이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구는 오로지 경전을 독송하는 것도 아니고 예배만을 행하여, 멀리서 사부대중을 보더라도 일부러 따라가서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나는 그대들을 감히 업신여기지 아니 하노니, 그대들은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하였느니라.
이리하여 사부대중 가운데 화를 내거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이가 나쁜 말로 욕설을 퍼부어 말하기를 “이 무지한 비구야, 어디서 왔기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그대들을 업신여기지 않노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 하면서 하나, 수기를 주듯이 말하는가? 우리는 그런 허망한 수기를 받지 않노라.”
이렇게 여러 해를 다니면서 욕을 먹어도 성을 내지 않고 항상 말하되, “그대들은 장차 부처가 되리라” 하니, 이 말을 할 때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고 돌을 던져도 피해 달아나면서 오히려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내 감히 그대들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노니, 그대들은 다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느니라. 그가 항상 이렇게 말하므로 잘난 체하는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별명을 지어서 ‘상불경’이라 하였느니라.
<법화경>에서 특이한 이미지를 갖고 등장하는 보살이 상불경보살이다. 보살이면서도 비구이므로 보살비구라 하였다. 먼저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인사말이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보살도를 행하여 부처가 될 것입니다’이다. 항상 업신여기지 않고 존경한다는 뜻으로 이름이 상불경(常不輕)이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법화경>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인연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해 놓고 있다. 8세 용녀가 성불했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만들 때 불상 모양의 장난감을 만들면 이것이 성불의 인연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부처가 되지 못할 인연은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신앙 의례에서 예불은 가장 중요한 근본이 된다. 절을 하는 것은 공경을 표하는 것으로 부처님을 받드는 기본자세이다. 달리 말하면 귀의할 때 취하는 태도이다. 귀의한다는 말이 범어의 나마스(namas)인데 이 말을 보통 ‘나무(南無)’라고 한자를 써서 읽는다. 이 나무가 예배를 의미하는 말로 귀의하는 신앙을 나타내는 말이다. 상불경보살의 말은 귀의ㆍ찬탄의 말로 남에 대한 예의(禮儀)의 극치를 나타내는 말로 볼 수 있다. 사람의 말이란 서술되는 표현의 수준이 있다. 흔히 말하는 이른바 반말보다는 존댓말이 격이 높은 것이다. 상대를 높여 말하는 것이야말로 ‘나무’를 통한 선행이다. 먼저 존경 찬탄의 마음이 우러나는 것은 의업의 선(善)이 되고 입으로 부르는 것은 구업의 선이 된다. 그리고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신업의 선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를 부르며 절을 하는 것이 삼업(三業)의 선이 되는 것이다. 상불경보살은 인사를 하다 수모를 당하고 심지어 구타를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가면서 인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였다. 불교의 수행은 중생의 마음을 성숙시켜 부처의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므로 자비가 지극해져 이 세상에 적(敵)을 두지 않는 것이다. 이를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 한다. 법화경문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전신(前身)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데바닷타가 과거 생에 부처님의 스승이었다는 이야기가 전생의 인연을 말하는 전신 이야기인데 ‘상불경보살품’에서도 상불경보살이 과거생의 석가모니의 전신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중생이 누구나 전생, 금생, 내생 삼생(三生)의 인연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이고 내일의 내가 되듯이. 전생이 어제와 똑같은 의미의 과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