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에겐 애국가도 ‘찬송가’
한국표준수화 ‘애국가’ 종교편향 논란
‘하느님이 보우하사’ 구절서
기독교 유일신으로 통역 돼
의미 표현할 대체어 부재해
표준수화 이전 1900년대엔
‘하늘’ + ‘님’ 으로 수화 표현
“의도적 왜곡” 의혹 제기도
한국 국가인 ‘애국가’가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사실상 ‘기독교 찬송가’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애국가를 청각장애인들의 언어인 수화(수어)로 통역하는 과정에서 일부 구간이 종교적 의미를 담은 수화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애국가 1절의 ‘하느님이 보우하사’ 구절이다. 한국표준수화규범 제정 추진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정립한 ‘수화로 하는 애국가’에 따르면, 해당 구절의 ‘하느님’은 기독교 유일신인 ‘하나님(야훼)’을 뜻하는 수화로 표현되고 있다.
심각한 문제는 현재 한국표준수화를 기준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수화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립국어원과 한국농아인협회가 발간한 한국수화사전에 ‘하느님’과 관련한 수화단어는 공식적으로 두 가지다. ‘기독교에서 믿는 유일신(야훼)’의 의미를 지닌 ‘하나님’과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의미를 지닌 ‘하느님’이다. 이 중 애국가의 ‘하나님이 보우하사’는 문맥상 ‘하늘(天)’을 어원으로 한 보통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해당 구절은 ‘하느님’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현재 표준수화에서 두 단어는 모두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으로 동일하게 표현된다. 이는 기독교수화사전의 ‘하나님(유일신으로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는 절대적이며 인격적인 존재)’ 수화 표현과도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청각장애인들은 애국가 공식통역에서 자연히 기독교의 하나님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애국가의 표준수화가 오히려 청각장애인들을 종교자유를 침해하거나 종교편향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불자 청각장애인 하영준 씨는 “일반인들이 보면 단어 하나의 오류일 수 있지만 청각장애인들은 이를 통해 애국가 자체를 종교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토로했다.
조계종 조계사 장애인전법팀 원심회(회장 김철환)는 최근 논평을 통해 종교편향적 수화의 개선을 촉구했다. 김철환 원심회장은 “보통명사로서 ‘하느님’을 표현할 수 있는 수화단어가 추가로 정립돼야 한다”며 “한국수화사전 개정판에 반영되는 것은 물론, 그 이전이라도 이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작업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애국가의 수화 통역이 의도적으로 왜곡됐다는 의혹도 나온다. 표준수화가 제정되기 전 1900년 후반, 농아학교에서는 애국가의 ‘하느님’을 ‘하늘’과 ‘님’을 뜻하는 수화를 조합한 표현으로 교육했다는 것이다. 당시 농아학교 등에서 수화를 배운 청각장애인들의 상당수가 애국가의 수화통역을 ‘하늘+님’으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정작 표준수화에서는 기독교적 하나님으로 정립된 셈이다.
한국표준수화규범 제정 추진위원회에서 불교수화 연구원으로 참여했던 한휘 씨는 “나 역시 과거 농아학교에서 애국가를 배울 때 ‘하늘+님’의 표현으로 수화를 배웠고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는 청각장애인들이 적지 않다”며 “표준수화 제정 이후 오히려 청각장애인에게 종교편향적인 요소가 발생한 것은, 수화통역을 하는 분들 중에 워낙 기독교계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광림사연화원 이사장 해성 스님은 “과거 왜곡되거나 비하의 의미로 잘못 사용되는 불교수화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는 데 공력을 쏟다보니 다른 종교의 수화가 공적영역에서 잘못 사용되는 부분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며 “문제가 분명히 드러난 만큼 개선을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지희 기자 jh35@hyunb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