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중심·첨단매체 활용…미래 불교 키워드
[대전환, 찾아가는 불교] 찾아가는 불교는 무엇인가 1100만 불자, 과거 영광… 500만 전락 위기 원하는 정보 언제든 손쉽게얻는 초연결사회 도심서 능동적·적극적 불교 구현해 나가야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세속화와 함께 한국사회는 급속도로 탈종교화하고 있다. 각종 종교인구 조사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의 비율이 종교가 있는 사람을 넘어선 지는 이미 오래됐다. 2005년 통계에서 1100만 불자라는 조사 결과는 이미 과거의 영광이 되었고, 2025년에는 500만 불자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불교계를 억누르고 있다. 도대체 한국불교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침몰하는 배와 같은 한국불교의 운명을 혁신적인 전환과 새로운 도약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까?
비록 불교가 종교라는 카데고리에 속하고 있지만, 불교는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종교와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불교가 보살 사상과 정토 신앙을 통해 구원의 종교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스스로의 지혜와 노력을 통해 우리 삶의 주변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번뇌와 집착을 끊어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가르침을 익혀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다양한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평정하고 고요하며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로 만들어 이러한 지혜가 작용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즉, 진정한 불자가 된다는 것은 수많은 시간과 의지적 노력과 지속적인 수행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그냥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 불자들은 기쁨과 쾌락에 집착하는 일상적인 삶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계율을 지켜야 한다. 재가 불자는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의 5계를 지켜야 하고, 출가 비구와 비구니는 적어도 200~300여 개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
비록, 이러한 계율이 계단을 오를 때 의지할 수 있는 난간과 같은 것으로서 불자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지만, 불교도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금지규정 속에 묻혀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자의 삶이란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이기 쉽고, 움직이기보다는 앉아있기 쉬우며, 활기차기보다는 침체되기 쉽고, 함께하기보다는 혼자이기 쉽다.
그렇다면 불교가 혁신적인 전환과 새로운 도약을 위해 직면해야 할 오늘날의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한국사회는 사상과 이념에 의해서 좌우되기보다는 과학과 경제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
이미 4차 산업 시대에 진입한 한국사회에서 사회구성원 대부분은 인터넷을 통해 즉시적이고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초연결 사회의 구성원들은 클릭 한 번으로 자기 생각을 사회구성원들 전체와 나눌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 이들은 무언가를 행하면서 그 결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를 즐기고 있으며, 스마트폰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원하는 정보를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접근하기 어렵고,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며, 힘든 수행을 해야 하고, 소극적이며, 앉아있고, 침체되어 있으며, 혼자인 종교로 비치기 쉽다.
한국불교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오늘날 불교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조금씩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
비록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현대의 불교는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모습에서 서서히 탈피하고 복잡다단한 사회로 귀환하고 있으며, 명상, 힐링(Healing), 생명, 불교문화재 등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현대인의 삶 속에 긍정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새롭게 도약하기에는 부족하다. 한국불교가 새로운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활기차고, 함께하는 태도로 전환해서 능동적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불교는 적극적으로 포교에 나서는 요란한 종교가 아니다”, “산사에서 수행하지 않고 도시에서 무슨 야단법석이냐”, “수행자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무슨 행사를 이렇게 많이 하는가”라고 비판하면서, “스님들이 바르게 생활하기만 하면 신도는 자연히 늘어나게 마련”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늘어놓고 한국불교가 직면한 냉엄한 현실은 애써 외면한다. 출가 지원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지방의 빈 사찰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사찰 신도들은 급속히 고령화되고 있고, 사찰의 청소년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성향에 대해서 고민했다면, 불교가 더는 기존의 방식대로 가만히 있으면서 수동적으로 대처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한국불교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 변화’라는 신호탄은 어떻게 쏘아 올려야 할까? 한국불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다가가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법하고 포교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도시에서 한국불교가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도시에서 한국불교가 변화의 토대를 마련했을 때, 한국불교의 혁신적인 전환과 새로운 도약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명산대찰이라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한국불교는 오랫동안 스스로의 모습에 안주하면서 현대사회의 중심인 도시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한국사회는 도시화와 함께 인구 대부분이 도시로 이동했지만, 한국불교는 여전히 물려받은 유산과 함께 명산대찰에 안주해왔다. 따라서 불교가 도시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사이에 타종교가 도시에 맞는 시스템과 장엄한 건축을 통해 도시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도시는 적극적으로 공략해서 완전히 정복해야 할 영토와 같은 곳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초연결 사회를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불교에 만족하지 않는다. 4차 산업 시대에 적응하여 사회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으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앉은 불교, 가만히 있는 불교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도시의 불교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다양한 첨단 매체를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불교의 장점을 알릴 수 있어야 한다. 도시의 불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전법에 나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식간에 확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도시의 불교는 명상과 수행을 통해 급변하는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도시의 불교는 모두가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고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도시의 불교는 즉시적이고 즉각적으로 지속 가능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앉은 불교에서 움직이는 불교, 침체된 불교에서 활기찬 불교, 소극적 불교에서 적극적 불교로, 미래불교는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불교”라는 신념을 가지고 시대적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능동적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한국불교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