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불교의 바닷길’ 기획한 윤리나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 

“해상 조난·표류도 불교 교류 루트였죠” 올해 3월 1일까지 진행된 ‘불교의 바닷길’ 기획전시 코로나19서도 연일 ‘성황’ 불교 교류 다양성 확인해 나한상서 나온 기흥대장경 표류해온 商船서 흘러들어 스님 저술 일본표해록 ‘눈길’ 해양박물관서 이례적 전시 여러 난관들 佛心으로 극복 “원학·만당 스님께 감사해”

2021-04-10      대전=신성민 기자
윤리나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이화여대 과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지질과학과에서 이학석사를 받았다. 부경대 지구환경과학과에서 ‘마애석불의 화강암질 모암에 대한 암석학적 특징과 화학적 풍화 연구’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청 전시큐레이터를 지냈으며, 현재는 국립해양박물관에서 학술연구, 유물구입, 전시기획과 운영 등 학예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과학관 및 박물관 운영 관련 자문, 평가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서울 화계사 석불 조성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기원전 6세기 석가모니 부처님이 창시한 불교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래된다.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고구려가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다.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왕 부견이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 한반도 불교의 시작이고, 교과서에 수록된 공식적인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사상과 문물은 육로를 통해서만 교류·전래되지 않았다. 도리어 해상을 통한 전래가 더 빈번했다. 그럼에도 해상 불교 전래와 교류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하다. 이같은 해상 불교 전래·교류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기획전시 ‘불교의 바닷길’이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지난 3월 1일까지 진행됐다.

국립해양박물관은 그간 등대, 항해도, 선박 등을 다루는 전시는 해왔지만, 불교 해상 교류사를 주제로 기획전시를 연 것은 처음 있는 이례적인 일이다. 이 전시를 책임지고 이끈 실무자가 윤리나 학예연구실장이다. 

4월 2일 대전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전시가 한 달이 지났음에도 여운이 남은 듯 했다. 전시 성과에 대해 묻자 곧바로 “상상 이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는 상황에서 전시회를 오픈했어요. 단계 조정에 따라 시간당 150명이나 200명 정도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안되겠구나’ 싶었죠. 하지만 하루 6차례 관람객을 받는데, 거의 매 시간이 매진이었어요. 주말에는 코로나19 방역에 따른 운영 변화를 인지 못한 부산시민들이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관람객 만족도 조사에서도 국립해양박물관 전시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관객들의 호응이 있었던 것은 여지껏 국립해양박물관에서 다루지 않았던 ‘불교’를 해양과 접목시켜서다. 기획전에서는 바다를 통한 불교의 문화 교류를 총 76건, 119점의 자료를 토대로 3부로 나눠 보여줬다. 윤 학예연구실장도 “해양 불교만을 주제로 다뤘다는 점, 바다를 매개로 불교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시의 의미가 특별하다”고 자평하며 “외부에서도 해상을 통한 불교문화 교류를 단독 주제로 이 정도 수준으로 풀어낸 전시는 처음이라며 다들 높게 평가해주셨다”고 밝혔다.

대흥사 천불상. 이운 중 배가 표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불상 등 부위에는 ‘日’이 전자로 그려져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롭게 조명된 역사에 대해서는 해상 조난·표류를 통해 이뤄진 불교 교류사를 꼽았다. 전시회의 3부 ‘불교, 바다를 향한 간절함’에 소개된 것이다. 관련 성보문화재로는 불갑사의 1706년 조성된 나한상과 복장물인 〈가흥대장경〉 등이 있다. 

윤 학예연구실장에 따르면 〈가흥대장경〉은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100년간 절강성을 중심으로 발행됐던 최초의 방책본 대장경으로, 국가 주도로 조성된 대장경과는 달리 판매와 보급을 위해 만들어졌다. 1681년(숙종 7년)에 전남 임자도 앞바다에서 중국 무역선이 난파돼 〈가흥대장경〉이 대량 유입됐고, 백암 성총 스님에 의해 목판으로 판각되면서 조선 후기 불교 사학과 인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본으로 수출돼 〈황벽대장경〉으로 복각되기도 했다. 

송광사성보박물관 소장 〈일본표해록〉과 대흥사 천불상도 표류와 조난의 교류사의 흔적이 있는 성보문화재다. 

〈일본표해록〉은 1821년 화순 쌍봉사의 화승 풍계 현정 스님이 저술한 것을 1882년 석곡 스님이 필사한 것이다. 저자인 현정 스님은 해남 대흥사 완호 윤우 스님의 요청으로 1817년 경주 불석산에서 천불을 조성했다. 이를 완도 상선과 홍원 상선에 각각 실어 대흥사로 항해하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 완도 상선은 무사히 대흥사에 도착했지만, 현정 스님이 탔던 홍원 상선은 일본 사이카이도(西海道)에 표착했다. 선법(船法)에 따라 현정 스님 일행은 본도인 나가사키(長퀺島)에 송환돼 7개월 동안 일본에서 머물렀다. 당시 현정 스님은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불교와 일반인들의 생활 방식, 표류인 송환체계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전시된 대흥사 천불상은 표류로 인해 일본으로 갔다가 돌아온 불상들이다. 이들 불상의 어깨에는 ‘날 일(日)’자가 표시돼 있는데 2011년 발견된 다산 정약용이 완호 윤우 스님에게 보낸 서찰에서 “반드시 부처의 등에다가 작은 전자로 ‘日’을 써서 표시로 삼아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은 뒤에야 서로 뒤섞이는 탄식이 없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확인되면서 그 연유를 알게 됐다. 

“대흥사 천불상은 관람객들에게도 정말 인기가 좋았어요. 천불상이 금란가사를 수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좋아했죠. 무엇보다 이같은 일련의 문화재들은 해양을 통해 교류가 무역이나 이동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조난·표류와 같은 재난을 통해서도 이뤄져 왔음을 알게 하죠. 중국 무역선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온 〈가흥대장경〉이 당시 조선 불교와 인쇄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사뭇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풍계 현정의 〈일본표해록〉 표지. 천불상을 이운하던 중 표류해 일본으로 간 뒤, 기록한 표류기다.

윤 학예연구실장은 전시 마무리 부분에도 역점을 뒀다. 전시의 마지막은 목어와 연꽃으로 장엄했다. 또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중 하나로 바다가 가진 8개 공덕에 대해 부처님이 설한 〈불설해팔덕경(佛說海八德經)〉의 내용을 공유했다. 바다의 8개 공덕이 우리 인생사와 닮아서다.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보타낙가산은 ‘꽃과 나무로 가득한 작은 산’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포탈라카’입니다. 심청이 임당수에서 피어난 것도 연꽃으로의 환생이었습니다.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의미를 되새기며 관람객들이 연말연시를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전시를 목어와 연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유난히 힘들었던 코로나19 시기에 연꽃으로 아름답게 승화했으면 하는 기원도 있었어요.”

윤 학예연구실장이 이렇게 ‘불교의 바닷길’ 기획전시회에 매달린 것은 ‘불교의 해상 교류를 대중에 알리겠다’는 부처님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사실 윤 학예연구실장은 늦게 불교를 접했다. 본래 그의 집안은 가톨릭 신도로, 본인도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종교적인 감동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고, 시간이 흘러 40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교를 만나게 됐다. 

“제가 마흔 되는 해에 수원에서 살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용주사에게 가게 됐는데, 사찰이 너무 아름다운 겁니다. 다음 날도 사찰을 찾았는데 사찰이 가지고 있는 색이 너무 좋았어요. ‘이게 뭐지’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대전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때 불교를 한번 공부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태전사에 가서 기초교리 강의를 신청해서 수강했습니다.”

불갑사 나한상 복장물인 가흥대장경. 중국 상선이 표류해 왔다가 유출된 것을 백암 성총 스님이 목각으로 판각하며 보급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윤 학예연구실장이 대견했는지 당시 태전사 주지 스님은 자신이 오래 간직했던 법명인 ‘진여심(眞如心)’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내려줬다. 

“불자가 되기는 했지만, 불교는 아직도 잘 몰라요. 그냥 사찰에 가는 것 좋아하고, 절하는 것 좋아하는 평범한 불자예요.”

본인은 평범하다고 했지만, 마애불에 대한 암석적 특징과 화학적 풍화를 연구해 이학박사가 된 과학자를 평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같은 연구로 그는 서울 화계사 마애석불 조성 당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활동하며, 불교와 해양사를 연계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발원과는 달리 전시는 준비부터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코로나19라는 외부 상황뿐만 아니라 불교 전시를 해본 적이 없었던 해양박물관으로서도 새로운 시도여서 내부적 반발도 있었다. 불교 문화재를 대여해오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극한 마음은 통하는 법이다. 前 해인사 성보박물관장 원학 스님을 찾아가 설득하고, 다시 해인사 임회에서 전시 설명을 해서 해인사 소장 성보문화재를 대여할 수 있었다. 또한,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을 찾아가서 나한상과 〈가흥대장경〉 복장물들도 협조를 받았다. 

“원학 스님은 개막하고 나서 직접 박물관을 찾아서 전시회를 꼼꼼하게 관람하셨어요. 2시간 30분을 관람했는데, 좋은 전시라고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 격려 한 마디에 그간의 힘들었던 일들이 한 번에 사라지더군요. 문화재 대여와 많은 도움을 주신 원학 스님과 만당 스님, 그리고 조계종 총무원 관계자 분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윤 학예연구실장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불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양 교류사가 조명되는 전시가 열렸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번 ‘불교의 바닷길’ 전시를 시작할 때, 목어를 두드리는 초발심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의상 스님의 바닷길이 보타낙가산에서 한국 관음신앙의 유산으로 이어졌듯이, 이번 ‘불교의 바닷길’ 전시가 불교 해양 교류사 탐구와 전시의 새로운 길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제 시작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국립해양박물관이 그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이죠.”

〈불설해팔덕경〉에서 부처님이 설한 바다의 8번째 공덕은 “바닷물은 그 짠맛이 주변이나 가운데나 두루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 ‘한결 같음’으로 바다는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품었다. 그 역사 안에는 불교의 시간도 존재한다. 자연 환경과 불교에 대해 천착했던 윤 학예연구실장이 한결같음이 ‘불교의 바닷길’이라는 새로운 관점의 전시가 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의 다음 전시와 연구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