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읜 정진, 깨달음의 첩경
6. 〈금강경〉과 선 中 근현대 깨달음 논쟁 촉발 한국 불교선 정의 부정확 선종의 본래 성불 의미는
보시·봉사서 진정 발현
이 시대의 철학자 김용옥 선생은 〈금강경 강해〉라는 저서에서 〈금강경〉과 선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책에 ‘서문’을 쓴 법정 스님은 〈금강경〉을 선종의 소의경전이라 하며 도올을 거사라 상찬한다. 알고 보면 이런 아이러니도 드물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불교의 정견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의식으로 〈금강경〉 공부를 계속해 보자.
〈금강경〉의 깨달음과 한국불교의 깨달음 논쟁
〈금강경〉 2분에서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께 이렇게 묻는다.
“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수보리의 질문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부처님께 묻는 것이다. 이 물음은 모든 불제자들의 근본적인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생사 윤회를 해탈하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불교의 깨달음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無上正等覺)’이다.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가장 높고 바른 것이다. ‘가장 높고’란 위없는, 더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이다. 한 마디로 최고의 깨달음이다. 부처님 자신이 깨친 깨달음을 말한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깨달음, 생사 윤회를 해탈한 깨달음이다. 일체의 번뇌망상을 완전히 소멸시킨 열반(涅槃)을 성취하는 깨달음이다.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남방과 북방, 그리고 선종의 견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한국불교에는 현대에 와서 깨달음 논쟁이 크게 두 번이나 있었다. 하나는 1980년대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추대 후 〈선문정로〉를 출간하여 “깨달음에 대하여 선종은 돈오돈수이고, 교학은 돈오점수이니 선에서 돈오점수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불교학자들과 송광사 등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설을 지지하는 분들이 반박하여 ‘돈점논쟁’이 크게 일어났다.
그 뒤 2015년을 전후하여 당시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깨달음은 연기 무아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안국선원 수불 스님이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마음을 깨치는 것이다”고 반박하여 다시 깨달음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깨달음에 대한 위 두 논쟁은 배경이 다르지만,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시비라는 점에서는 같은 문제이다. 이것은 한국불교에 아직도 깨달음에 대한 견해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불교가 앞으로 더 발전하려면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결집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란 깨달음 이라는 뜻이니, 불교는 깨달음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차례 깨달음 논쟁은 한국불교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확인해주었다. 근래 여러 서적이나 최근 유행하는 유튜브 같은 곳에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지금처럼 많은 주장이 공공연히 난무하는 때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불교의 정체성 정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이 깨달음에 대한 정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남방의 불교문화권에서는 보기 드문 한국불교의 깨달음 논쟁은 매우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깨달음 논쟁과 연구를 더 발전시킨다면 깨달음에 대한 현대적인 정립으로 인류 세계가 직면한 문명사적인 위기를 해결하지 않을까. 대안 사상으로 그 가치가 있지 않을지 조심스레 전망해 본다.
〈금강경〉의 완전한 열반과 선의 본래성불
다시 〈금강경〉 수보리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깨달음을 향해 가는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답한다.
“온갖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수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아무도 없다.”
동문서답 같은 답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데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 열반은 얻은 중생이 아무도 없다니 ...
그런데, 이 알쏭달쏭한 부처님 말씀이 바로 禪에서 말하는 깨달음, 열반과 일치한다. 어째서 그런가? 중생을 깨달음에 들게 하지만, 실제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아무도 없다고 한 이 〈금강경〉의 부처님 말씀은 바로 선종에서 말하는 ‘본래성불(本來成佛)’, 본래부처 사상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일체 중생이 본래 완전하고 청정하여 깨달음이 완성되어 있기에 부처가 깨달음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열반을 얻은 중생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하는 분인가? 부처님은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의 지혜와 복덕을 다 갖춰져 있는데, 단지 분별망상에 가려져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치고 알려준 분이다. 부처님은 불교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 얼마나 좋고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깨쳤기에 그 깨달음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가서 스스로 깨달아 생사 윤회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으로 가라고 안내하는 분이다.
그러니, 이웃종교의 신처럼 부처님을 보게 되면, 불교를 잘 모르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을 믿어야 신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지만, 불교에서 부처는 스스로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고 그 길을 알려준 분이나 다른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나 예수, 알라는 고유 명사이나 부처는 보통 명사다. 기독교의 신은 유일무이한 절대자이나 불교의 부처는 누구나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절대자이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이 본래 완전하니 그대로 신과 같은 절대자이고 일체의 지혜와 복덕을 구족해 있다는 것을 깨치고 알려준 분이다.
〈금강경〉의 가르침, 기복이냐 깨달음이냐?
그러나, 우리 중생은 밖으로 믿기는 쉽지만, 깨달음은 쉽지가 않다. 남에게 의지하여 복을 구하고 극락 가는 길은 쉬우나 스스로 복을 짓고 마음을 닦는 깨달음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수보리장로가 우리를 대표하여 부처님께 묻는 것이다.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향해 가는 중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부처님은 우리에게 밖으로는 무상(無相)으로 보고, 안으로는 무아(無我)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내가 있다’는 견해〔我相〕, ‘내가 사람’이라는 견해〔人相〕, ‘내가 중생’이라는 견해〔衆生相〕, ‘영혼이 있다’는 견해〔壽者相〕를 비우고 머무는 바 없이 살라 한다. 이것이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이다.
남을 돕고 보시ㆍ봉사할 때에도 머무름 없이〔無住相〕, 집착 없이 보시ㆍ봉사하라 한다. 우리는 흔히 남을 돕는 보시ㆍ봉사할 때 어떤 상대적인 대가를 생각하며 한다. 이렇게 하면 복 받기 위해 불사 시주ㆍ봉사하는 장사고 거래이지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ㆍ봉사는 아니다. 불교의 보시ㆍ봉사는 대가 없는 조건 없는 머무름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 보시ㆍ봉사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왜냐하면 ‘나’라는 분별을 내려놓고 하니 내가 곧 우주 만물과 하나가 되는 무아라 분별과 헤아림이 불가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보시ㆍ봉사할 때 내가 무아라는 정견을 갖추고 하게 되면, 그 공덕이 무량하고 곧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무아의 정견이 없이 보시ㆍ봉사하면, ‘내가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 ‘내가 한 만큼’을 은근히 댓가로 바라게 된다. 이것은 삿된 보시ㆍ봉사다. 중국의 불심천자로 불리던 양나라 무제가 바로 그런 분이다. 양무제는 절을 2500개나 짓고 탑을 쌓는 불사를 하고 역경과 공양의 보시 공덕을 지어 자신의 만수무강과 황실의 안녕을 빌었다. 불교사에서 양무제만큼 많은 불사를 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양무제는 마음이 늘 초조하고 불안했던 모양이다. 인도에서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오자 황궁으로 초빙하여 자신의 불사 공덕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공덕이 없습니다〔無功德〕’라고 달마대사가 답한다〈조당집〉. 달마대사의 예언인지 양무제의 불사 과보인지 양무제는 말년에 부하 장수의 반란으로 황제의 지위에서 쫓겨나 굶어죽었고, 양나라는 망했다. 어째서 그가 간절히 빌은 황실의 안녕은 어디로 가고 그토록 참혹한 과보를 받았는가? 양무제는 〈금강경〉을 잘못 보고 ‘내가 있다’는 아상으로 복 받고자 불사를 하니 생사 윤회도 벗어나지 못하고 황제 개인 재산이 아니라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불사금으로 충당하였으니 그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금강경〉 이해,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 난다”
〈금강경〉 전문이 다 중요하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이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應無所住 以生其心)”이다. 선종의 6조 혜능대사도 이 말에 신심이 나서 깨달았다. 그런데 이 경구의 해석이 문제다. 지금 조계종본 〈금강경〉에서는 ‘마땅히 집착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번역한다. 이렇게 하면, 집착도 있고, 내어야 할 마음도 있다는 양변에서 하는 것이 된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이렇게 풀이 하지 말고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고 풀이한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처럼 중도의 마음으로 존재하니 분별망상만 비우면 그 마음이 저절로 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