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아닌 행의 가르침, 〈금강경〉
오조 홍인, 〈금강경〉 돈오 밝혀 육조 혜능, 〈금강경〉 해설 전해 행으로 법을 드러낸 특징 보여 마음을 깨치고 생로병사 해탈
부처님 말씀을 모아 놓은 경전은 다 귀중하다. 좋고 나쁜 경전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불자들이 가장 많이 공부하고 독송하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심지어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종에서도 소의경전으로 삼았고,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도 〈금강경〉이다.
〈금강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금강(金剛)’은 인도말 ‘바즈라’를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벼락’ 또는 ‘금강석’을 말한다. 벼락 같이 번뇌망상을 부숴버린다. 또는 금강석 같이 가장 단단하고 빛나는 보석 중의 보석인 다이아몬드를 상징한다. 반야는 ‘프라즈나(prajna)’로 지혜를 말한다. 금강 반야는 ‘다이아몬드 같은 지혜’다. 바라밀은 ‘파라미타’로 욕망의 이 언덕에서 깨달음 세계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이다. 경(經)은 지름길이며, 부처님 말씀을 말한다. 그러니 〈금강경〉이란 다이아몬드 같은 지혜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금강경〉의 역사
〈금강경〉은 본래 독립된 경전이 아니었다. 팔만대장경 중 가장 많은 분량의 반야부 600권 중 577권의 한 대목이었는데, 워낙 뜻이 깊고 고준하여 한 권의 독립된 경전으로 편찬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였다. 대승불교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처님 일대기 중에 반야부 경전을 설한 시기가 가장 오래 되어 그 분량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남방 상좌부 승가에서는 팔리어 니까야 〈아함경〉만을 부처님 친설로 보고 그 나머지 반야부나 법화, 화엄의 대승 경전은 아직도 부처님 설법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금강경〉은 남방에서는 산스크리트어경만 남아 있고, 북방으로 와서 구마라집(344~413)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널리 읽혔다. 후대에 현장(602~664)법사가 원문에 충실한 직역을 하였지만, 구마라습 번역본이 의역과 축약을 통해 읽기가 좋아 대중들이 선호하여 정착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양나라 무제의 아들 소명태자가 〈금강경〉을 공부하기 편하게 32분으로 나누고 그 핵심을 소제목으로 붙여 편찬하니 더 공부하기가 좋아졌다. 이것은 분명 남방불교 상좌부승가의 흐름과는 다른 불경 연구의 발전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 500년 동안에는 유식 법상종과 천태, 화엄종이 주류가 되어 〈법화경〉과 〈화엄경〉, 그리고 〈열반경〉 등이 주로 연구되었다.
〈금강경〉과 ‘동산법문’의 등장
그런데, 동아시아에 전래된 불경이 구마라집 이후 창의적 한문 역경이 이루어지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법상종과 천태종, 화엄종 같이 새로운 사상과 종파가 등장하면서 불교 사상이 더 다양하게 발전한다.
7세기 중엽 당나라시대에 이르면, 양자강 근처 홍매현 동산이라는 곳에 홍인대사가 문하에 1천여 대중과 함께 〈금강경〉 한 권으로 단박에 부처되는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소위 ‘동산(東山)법문’의 출현이다.
이 동산법문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새로운 전환이었다. 지금까지 불교는 일반 대중은 부처님 말씀인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외우거나 베껴쓰면서 부처님 이름을 부르거나 다라니를 염송하며 부처님께 복을 빌어 무병장수와 복 받기, 그리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극히 일부 교학승만이 방대한 경전에 의지하여 마음을 닦아 부처가 되는 공부를 했다. 하지만, 동산에서 오조홍인대사의 법문은 오직 〈금강경〉 한 권으로 바로 부처되는 돈오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때 저 남방에 살던 무지한 나무꾼 혜능이 우연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응무소주 이생기심)”는 〈금강경〉 사구게를 듣고 신심이 나서 부처가 되고자 동산으로 가서 출가한다. 그는 단지 8개월 행자 생활 중에 홍인대사가 읽어주는 〈금강경〉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확철대오하여 선종의 6조로 인가를 받는다. 〈금강경〉과 함께 선종의 6조 혜능대사의 출현은 동아시아 불교사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혜능대사의 돈오선법이 선종의 주류가 된다. 이와 함께 선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으로 정립되었고, 육조도 〈금강경〉을 해설한 구결이 전한다.
〈금강경〉과 선에 대한 오해와 정견
우리 시대의 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은 〈금강경강해〉라는 저서에서 “〈금강경〉과 선종은 역사적으로 일푼어치의 직접적 관련도 없다”며 “선이란 본시, 이전의 일체의 교학불교를 부정하는데서 생겨난 불립문자, 직지인심의 아주 래디칼한 토착적 운동이고 보면, 선은 문자로 쓰인 모든 경전을 부정하는 일종의 반불교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을 비판하고 〈금강경〉과 선의 관련을 부정하였다.
이 시대에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이름난 명문대 교수를 지냈고, 방송국에서 수시로 고전과 불교 경전 강의를 하여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이렇게 준열하게 선을 비판하니 이런 영향을 받은 우리 불자들이나 인문학도들은 대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참 안타깝다. 더구나 이 책의 서문을 법정 스님이 쓰셨으니 이 책의 위상은 더 말할 것이 없다.
필자는 비록 아는 것이 부족하고 한정된 지면이나 현대불교신문의 좋은 인연을 만나 이 지면을 통해서 선에 대한 오해와 왜곡된 견해를 살피고 그런 인식의 문제와 오해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이미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가 〈금강경〉의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쳤고, 선종의 소의경전이자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이 〈금강경〉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은 어째서 〈금강경〉과 선의 관계를 부정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선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고, 그것이 선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금강경〉의 말 없는 설법과 선
선종의 소의경전 〈금강경〉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거룩한 비구 천이백오십 명과 함께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걸식하고자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하신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금강경〉의 시작은 부처님께서 한 말씀도 하지 않고 단지 비구들과 차례대로 걸식하여 공양하고 씻고 자리를 펴고 앉는 일상의 모습만이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일상을 통하여 깨달음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선문에서는 〈금강경〉의 이 대목을 부처님이 말 한 마디 없이 오직 행으로 평상심이 도라는 것을 그대로 알려주는 최상승 법문으로 평한다.
여기에는 왕자로 태어나 금수저 중에 금수저였던 부처님이 출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고는 다시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 걸식과 무소유의 수행 공동체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어째서 부처님은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의 삶을 사셨을까?
우리는 부처님 팔만대장경 속에 수많은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감동하지만, 부처님께서 온갖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의 길을 버리고 평생 걸식과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법을 설하셨다는 이 거룩한 행이야말로 경전의 그 어떤 설법보다도 숭고하며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이와 같이 〈금강경〉에는 부처님이 평상시 삶의 모습을 통해 말이 아닌 행으로 법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말과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마음을 바로 보라는 선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 중도는 말이나 문자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 머리의 이해만으로 과연 금수저가 평생 무수저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금강경〉의 이 대목은 선에서 왜 말과 문자를 떠나 마음을 바로 깨치는 길을 강조하는 지 짐작하게 한다. 불교 공부에서는 말과 문자로 된 경전이나 조사어록 공부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과 행이다. 우리가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려면 말과 문자로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도 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음을 깨쳐야 한다. 즉, 스스로 자기 안의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소멸해야 한다. 삼독심을 비우는 것이 어찌 말과 문자로 되는 일인가?
마음을 깨치면 어떻게 되는가? 부처님은 평생 걸식과 무소유의 삶을 살아도 세상 그 어떤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지 않았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으로부터 영원히 해탈한 대자유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금강경〉을 통해서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불제자라면 〈금강경〉 첫 머리의 부처님이 깨치신 후 평생 걸식으로 하루 한 끼를 드시며 무소유의 공동체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삶이 괴롭고 힘들 때마다 가난하여 겨우 끼니를 이어갈지라도, 집도 차도 없이 겨우 방 한 칸의 삶을 살지라도 큰 병을 만나고 늙어서 걷기조차 힘들지라도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의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 평생 걸식으로 한 끼를 드시고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부처님께서도 병고에 시달렸고, 상한 음식을 드시고 돌아가셨을지라도 병의 괴로움에 머무시지 않았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셨음을 기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