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心으로 민주화 이끈 미얀마 어머니
3. 아웅산수지 국가고문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현재 감금 삶 자체가 불교적 수행의 연장선 스님들, 군부 보시는 거부한 반면 수지 고문의 보시는 받아들이기도
코로나로 인해 2020년 4월에 한국으로 일시 귀국했다. 미얀마 복귀를 기다리던 나에게 백신 공급은 한 줄기의 희망이었다. 2021년도는 미얀마로 복귀해 코로나로 못 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2021년 2월 1일 새벽 3시 역병보다도 무서운 ‘권력욕’에 의한 쿠데타가 미얀마에 발생했다. 아웅산수지(Aung San Suu Kyi) 국가고문, 우윈민(U Win Myint)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 많은 장관들과 정치인들이 수감되어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 총사령관은 아웅산수지 국가고문의 정치 제기를 막기 위해 이유 없는 재판을 준비 중이다.
아웅산수지 국가고문의 개인비서인 우쪼나잉윈(U Ζaw Naing Win)에게 현대불교신문 연재에 관해 요청할 예정이었는데, 그는 지금 어디로 끌려 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수 많은 미얀마 국민들이 88년도와 같이 ‘미얀마 민주화’와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 석방’을 외치고 있다.
아웅산수지는 영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여 ‘불자(佛者)’가 아니라고 오인 받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미얀마 사람다운 불자이다. 아웅산수지가 처음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섰을 때 군부정권은 그녀를 ‘불교를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운 소문을 퍼트렸다.
미얀마 정치전통에 따른 아웅산 수지의 행보
이러한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정면돌파였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미얀마 승단의 환영을 받았다. 군부의 보시는 거부하는 스님들이 아웅산수지의 보시물은 승낙을 하였고, 그녀가 연설하는 곳마다 미얀마 스님들은 방문하여 그녀에게 암묵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미얀마 역사를 살펴보면 미얀마 승단은 왕조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해 왔다. 왕은 자신의 신심만큼 승단의 보시를 했으며, 스님들은 불교적인 의식과 법회를 통해 왕에게 미얀마 왕으로써 정통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역사적 관습이 현대의 흐름에 맞춰 형태만 변화했을 뿐이지 아직까지도 미얀마 정치문화에 남아 있다.
미얀마 왕조의 정치전통에서 왕은 국사로 임명된 스님에게서 정치적인 조언을 얻었다. 그녀가 민주화 운동기간 동안 스님들에게서 정치적인 조언을 들은 것은 과거 정치전통이 미얀마 현대 정치에도 적용된 것이다. 전국을 도는 첫 유세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을 갈 때마다 많은 스님들을 만나서 민주화 운동에 관한 충고를 얻었다. 삐라는 지역에서 만난 스님은 수지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혼자서만 빨리 해탈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다른 이들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많은 고행의 삶을 산 수행자 수메다를 항상 기억하라. 선과 정의를 이루려면 오랜 세월 고행을 감내해야 한다.”
비폭력 민주화 운동의 근원은 자비
스님들의 이러한 조언 때문이었을까?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분명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미얀마의 민주화를 평화적으로 이룩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부를 향해 폭력으로 맞서 싸웠다면 미얀마의 민주화를 좀더 빨리 이룩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이 비폭력 운동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아웅산 수지의 불교적 신념이 큰 영향을 주었다.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억압적인 사회에서 잠자코 노예로 사는 안전한 삶보다는 기본적인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더 낫다고 확신하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운동이 비폭력 운동인 까닭은 인간의 본성이 공정함과 자비심을 애호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나는 폭력을 통해 변화를 꾀하는 방법을 권장하거나 영속화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한다면, 우리는 변화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폭력을 써도 된다는 생각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없애지 못할 거예요. 나는 그게 두렵습니다. 변화를 이끌어낸 바로 그 방법이 늘 우리를 위협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민주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거든요.
우리가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룬다면, 민주화 운동에 줄곧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 골수분자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거에요. ‘저들이 체제를 바꾼 건 폭력을 통해서였다. 우리가 저들이 행사한 폭력보다 더 우월한 수단을 강구한다면 권력을 도로 빼앗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 되는 거지요. 그래서 나에게는 비폭력주의가 정신적 신앙인만큼 정치적 전략이기도 한 겁니다. 폭력은 옳은 길이 아니예요. 그것은 우리가 강력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불교를 바탕으로 이끈 미얀마의 민주화는 성공적으로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폭력에 의해 불교 사상의 가치들이 무력화되면서 현실 사회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말 실현하기 어려운 것일까? 아웅산수지가 국가고문이 되고 난 후, 군인들을 법으로 심판해 감옥에 보내지 못 한 것에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녀의 불교적 사상 또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미얀마 국민들이 군인들을 ‘나쁜 악마’로 취급하는 것 또한 좋지 않은 점을 부처님과 앙굴리말라의 일화에 빗대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국민들에게 사람 자체보다도 그가 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앙굴리말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아무리 그가 변했다 하더라도 그의 행위는 여전히 끔찍한 것이었지만, 부처님 자신은 그가 저지른 행위와 그를 분리해서 보셨다는 내용이었지요. 일단 앙굴리말라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잘못이고 진짜로 참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옳은 길을 따르기 시작했어요. 부처님은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의 날개 아래 품어주신 첫 사람이었지요.”
아웅산수지는 가택연금을 당하는 동안 〈자비경〉을 매일 독송하고,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정심을 찾았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화요일마다 본인의 나이만큼 염주를 돌리는 수행을 했다.
아웅산수지 국가고문은 그림 애호가이기도 하다. 자신과 친한 미얀마 화가에게 그림 속에 타인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불교 경전 구절을 넣어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자신의 삶에서 행동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 2021년 2월 1일부터 가택구금을 당한 아웅산수지 국가고문은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미얀마 국민들의 믿음이 있다.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당할 때 함께 한 불교 수행이 그녀를 지탱해 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군부가 민주화를 억압하기 위해 든 총과 칼에 미얀마 국민들은 ‘민주화”라는 단일한 가치를 위해 서로가 서로를 연대하며 지지하고 있다. 시위를 하던 중 무자비하게 총을 쏘는 군경들을 피해 모르는 사람 집에 찾아가 몸을 숨기며,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음식을 시위대와 함께 나눠 먹으며 자비심으로 연대하는 미얀마 국민들을 보니 아웅산 수지가 예전에 했던 발언이 떠오른다.
“우리 국민은 종교와 관련된 말을 잘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메타(자비)’를 말하는 것이 추상적이거나 순진한 발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 말로 실천적인 선의(善意)를 많이 만들어낸다고 봐요. 나는 NLD에게 항상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온갖 무기와 협박과 억압에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지지하는지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고요. 아마도 ‘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뭔가가 있긴 있어. 우리도 행복해지고 싶어.’라고 말하겠지요.”
삶 자체가 불교적 수행의 연속인 아웅산수지 국가고문에게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가 멈추질 않길 바란다. 불자 정치인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앞으로 더 많은 세상에 울림을 주기를 기대하며, 복귀를 기다려보자.<양곤대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