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법 속에 만류귀종

4. 의 정견과 선 양극단을 여읜 중도는 정견의 또다른 이름 사회 편향 견해 제거, 존중과 배려 원동력 ​​​​​​​우주 만물 독립적 실체없이 연기로 존재해

2021-03-08     박희승 불교인재원 교수
조향숙 씨의석굴암 가전연존자 판화

 

중도 연기에서 초기·대승·선 하나로 회통

불교에는 다른 종교와 달리 방대한 경전이 있다. 기독교는 성경, 회교는 코란, 그리고 유교는 사서삼경으로 간단하나, 불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전이 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불교의 방대한 경전은 다양하고 풍부한 가르침의 장점이 있으나, 너무 방대하여 초심자들이 불교 공부에 혼란이 없지 않다. 이런 까닭에 선에서는 말을 끊고 문자를 떠나 바로 마음을 보라 한다.

하지만, 초심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너무나 많은 경전이 있고, 또 부처님 제자들의 논소와 어록까지 있으니 어느 경전과 어록을 보아야 하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초기 경전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경전은 〈초전법륜경〉이고, 그 다음이 〈가전연경〉이다. 둘 다 짧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가장 근본이 되는 경전이다.

〈가전연경〉에서 중도 정견

〈가전연경〉은 부처님 10대 제자 중 논리 제일 가전연 존자가 부처님께 바른 견해인 정견에 대하여 묻고 답한 경전이다. 가전연 존자는 설법 제일 부루나존자가 의견을 구할 정도로 불교의 논리에 밝은 분이었다. 이 〈가전연경〉은 한문역으로는 〈잡아함경〉에 수록되어 있고, 팔리어로는 〈Kaccyanagotta Sutta〉로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가전연 존자가 부처님께 묻는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른 견해, 정견(正見)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이 답한다.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있음(有)’과 ‘없음(無)’이다.…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상에 ‘없음’은 있을 수 없으며,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상이 ‘있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다.”

이 〈가전연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정견은 바로 중도를 말한다. 부처님이 깨치고 처음으로 설법한 초전법륜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를 말씀하시고 중도가 곧 팔정도라 하셨다. 부처님은 이 가전연과의 문답에서도 역시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를 말씀하시고 중도가 곧 정견이라 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으로 보아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중도이고, 중도는 곧 팔정도이며, 팔정도의 정견이 양극단을 떠난 중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도 정견이 곧 연기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가전연경〉에서 정견이 중도라 말하면서 덧붙여 연기도 말씀하신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즉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이 〈가전연경〉의 부처님 말씀을 보건데 불교의 정견이란 양극단을 떠난 중도이고, 중도 정견은 연기로 봄이라 하였다. 즉, 중도 정견은 나와 우주 만물이 서로서로 이지하여 존재한다는 연기라는 것이다.

연기(緣起)란 세상 만물이 서로 서로 의지해서 존재함을 말한다. 우주 만물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니 개별로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가령 괴로움도 일어나고 사라진다. 어떤 괴로움도 영원한 것은 없다. 생로병사도 그렇다. ‘생로병사하는 나’라는 존재도 ‘나’라 할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어야 생존한다. 단 한 순간도 산소를 마시지 못하면 내가 생존할 수 없다. 나의 생존에 산소와 물 등은 필수 조건이고 이것이 곧 연기적 존재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를 비롯한 우주 만물은 독립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부처님은 다른 경전에서 무아(無我), 무상(無相)이라 하셨고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 한다.

이렇게 볼 때 부처님은 〈초전법륜경〉과 〈가전연경〉에서 불교의 근본 교리를 다 말씀하셨다. 실제 부처님의 팔만대장경 중에서 〈초전법륜경〉은 가장 먼저 설법하신 것이니 그 가치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이 〈가전연경〉은 부처님께서 정견(正見)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유일한 경전이다. 대승운동을 일으킨 용수보살이 상좌부승가의 법에 집착하는 견해를 소승이라 비판하고 중도를 복원할 때 저술한 〈중론(中論)〉에서 경전 중 유일하게 인용한 경전이 〈가전연경〉일 정도로 대승에서도 가장 근본이 된다.

더 나아가 부처님이 가신 후 2500년이 넘은 1967년 해인총림에서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하여 불교의 근본이 중도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이 〈가전연경〉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니 〈가전연경〉은 초기 경전과 대승, 그리고 선종에서도 공히 근본이 되는 경전이라 할 수 있겠다.

중도 정견이 불교 공부 시작이자 완성

불교를 통하여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 연기로 보는 정견을 갖춰야 한다. 나와 세상 만물이 연기로 존재하며, 연기로 존재하는 만물은 실체가 없으니 무아고, 나라고 할 것이 없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으니 이를 중도 정견이라 한다.

우리 인류가 세상에서 지혜롭게 행복하게 살려면 중도와 연기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정견을 세워야 한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로 보는 정견 없이는 수행도 사업도 인간 관계도 연애도 주식 투자도 잘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내가 있다’ ‘나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한다. 나와 나의 것이 있다는 ‘있음’에 집착하면 병들고 늙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지금 같이 코로나 역병시대에는 바이러스 병과 죽음에 공포를 느끼고 괴로움을 받는다. 만약 코로나 역병을 정견하면 어떻게 되는가? 코로나도 중도 연기로 정견하면 코로나도 연기로 존재하고 나도 연기로 존재하니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연 따라 코로나도 생기고 사라지며 인연 따라 나도 연기로 존재할 뿐이다.

다만, 코로나는 전염성이 강하고 인류가 처음 만난 바이러스라 사람에게 붙으면 면역력이 약한 노약자들에게는 부작용이 일어나 호흡에 문제가 생기고 열이 나서 적절한 치료나 대책이 없으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코로나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고 피하려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가지 말고 가야 할 경우 마스크와 손씻기 등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최선이다. 한국처럼 방역을 잘 대처하고 국민들이 잘 실천하면 역병의 억제가 가능하다.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할 것이 없다.

물론, 신을 믿는 일부 종교인들이 “코로나에 걸려도 신이 낫게 한다”거나 “신이 코로나를 물러가게 할 것이다”라는 편향된 견해에 빠져 방역지침을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집단 감염을 확산시키는 것을 자주 본다. 이것이 바로 정견을 모르고 삿된 소견에 빠져 일어나는 어리석은 망동이다.

불교 소승의 법집 문제

초기 경전 중 〈초전법륜경〉과 〈가전연경〉의 중도 정견의 가르침은 대승과 선종에서까지 근본으로 보고 중시하였는데, 어째서 이 경전과 중도 정견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우리가 접하기 어려웠을까?

부처님이 가시고, 그 직계 제자들도 가신 뒤 부처님의 중도 정견의 말씀이 점점 희미해지자 제자들 사이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법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게 된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당시 상좌부 승가는 중도 정견을 세우지 못하고 부처님이 깨친 법이 ‘있다(有)’고 보는 편향된 견해가 다수의 입장이 된다. 이것이 상좌부승가의 ‘법유론(法有論)’이다. 부처님은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떠나 중도를 깨치고, 중도로 보는 것이 정견인데, 상좌부 승가는 법을 있다고 보는 양변에 떨어져 시비 분별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법유론의 양변에 집착하여 법을 설하고 행하는 입장을 ‘소승(小乘)’이라 비판하고 불교의 근본인 중도 정견을 복원한 것이 바로 ‘대승(大乘)’인 것이다.

중도 정견, 연기가 선

6세기에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전한 선도 부처님이 깨치고 말씀하신 중도 정견과 둘이 아니다. 동아시아 선종이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초기 경전의 중도와 정견이 바로 선이다. 불교의 중도 정견과 선의 상관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둘은 별개의 것이고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불교는 인도에서 출현했고, 선은 중국에서 나타났으니 다르다고 분별하고 집착하면 양변에 빠져 대립하고 갈등이 일어난다. 지금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자들 사이의 갈등이 그런 것이다.

반대로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와 연기의 눈으로 보는 정견이 서면, 부처님 말씀과 용수보살, 그리고 조사의 말씀이 둘이 아닌 중도불이(中道不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 연기법을 이해해서 바른 안목인 정견이 서면, 초기 경전과 대승 경전, 그리고 선어록이 둘이 아니라 중도법을 근본으로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강이든 낙동강이든 압록강이든 바다로 가면 하나이듯이 말이다.

이와 같이 중도 정견으로 보는 사람은 남을 나와 같이 보아 차별하지 않고 배려 존중한다. 설사 종교와 인종, 국적과 신분이 달라도 모두 연기적 존재이니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난다.

다음에는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금강경과 선에 대하여 살펴보자.

▶ 한줄 요약

중도 정견으로 보면 자타불이, 무차별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