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 경계 맛본 유일한 중국 황제

24. 청나라 옹정제와 선종 〈어선어록〉 간행, 일생불교 신봉 승조대사 선사의 반열에 올려놔 선종 내부 간섭도, 원오 지지해

2020-12-18     현견

청나라 세종 옹정 황제(1678~1735)는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윤진(胤턋)이며, 만주족으로 청 왕조의 제3대 황제이다. 44세에 보위에 올랐고 13년을 재임했으며, 강희 황제의 네 번째 아들로서 건륭 황제의 생부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를 ‘종사(宗師)’라 자처하면서, 원명거사(圓明居士), 파진거사(破塵居士)라는 두 개의 법호를 가지기도 했다. 〈어선어록(禦選語錄)〉이라는 책을 편집 간행해서 전국에 유통하기도 했다. 그는 일생 동안 불교를 신봉했고, 특히 선종에 관심이 많았으며, 태자 시절 몽골 스님인 장가호도극도(章嘉呼圖克圖)로부터 좌선을 지도받기도 했다. 중국 역사에서 치적을 이룬 몇 안 되는 군주 중의 한 사람이다. 즉 청조의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3대의 성세(盛世)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3대의 성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옹정제의 각 방면에서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청 왕조가 선종의 심법(心法)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옹정제는 스스로 좌선을 할 만큼 선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장가호도극도(章嘉呼圖克圖) 스님으로부터 수중(修證)에 대한 가르침과 인증을 받기도 했다. 장가호도극도 스님은 강희 황제로부터 관정보혜광자대국사(灌頂普慧廣慈大國師)라는 명칭을 하사받기도 했다. 옹정 황제도 스님을 칭찬하기를 “이는 진실로 다시 온 사람(환생자)이며, 실로 대 선지식이다. 계행이 청정하고 순수하며, 원통무애하고 티베트 몽골 및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귀의하는 바이며, 많은 승속이 공경하고 우러러서 사모한다”고 했다. 그는 장가호도극도 스님의 지도하에서 2일을 연속적으로 좌선을 하고 나서 말하기를 “곧 본래를 통달하니, 비로소 오직 이 하나의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는 후에 다시 장가호도극도 스님의 지도로 좌선을 해서 마침내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중국 역사에서 진정으로 실참해서 참선의 경계를 맛본 유일한 황제이기도 하다. 옹정제는 유년시절부터 불전을 열람하는 것을 좋아했고, 널리 선승들과 교류를 하였으며 불교의 이치에 대해서도 깊이 통달을 했다고 한다.

그림, 강병호

 

옹정 황제는 보위에 오른 후에도 틈이 있을 때마다, 경전 및 조사어록을 열독했을 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종실 친척, 멀게는 승려와 도사에게까지 본인이 집적적으로 경전 강의와 전법을 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옹정어선어록(雍正禦選語錄)〉을 출간했으며, 총 19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중요한 선종 선사 20명의 어록 및 500명의 선승과 거사의 선어를 선별해서 편집했으며, 동시에 본인이 저술한 선어를 수록하기도 했다. 또 승조(僧肇)의 조론(肇論) 보장론(寶藏論) 등의 논문을 수록했는데, 승조는 사실 선종사에서 선사의 반열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옹정제는 승조대사를 선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의 관점은 “선명(深明)한 종지가 아니면, 어떻게 이같이 요달해서 알 수가 있겠는가?”라고 감탄하면서, 승조대사를 대지원정성승(大智圓正聖僧)이라고 봉하였으며, 또 중국 도교사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자양진인(紫陽廬人) 장평숙(張平叔)을 대자원통선선(大慈圓通禪仙)으로 봉하기도 했다. 이외도 정토종의 운서 주굉의 〈운서법휘(雲棲法彙)〉에 대해서 평가하기도 했는데, 즉 “정토법문은 비록 선종과는 교섭이 없는 것 같지만, 염불은 참선을 장애하지 않는다. 과연 그 깊은 성해(性海)를 통달한 선인(禪人)은 정업(淨業)을 겸수할 수 있다. 어찌 수희진여(隨喜廬如)하는 것이 묘과를 원증(圓證)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이같이 불법 및 도교 선종에 관해 해석하고 평가했는데, 이 책은 불교를 연구하고자 하는 후래 사람들에게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보면 적지 않은 승려들이 정사에 관여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황제 최측근에서 정치에 훈수를 두면서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승려 또한 적지 않다. 옹정제는 비교적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으며, 특히 황제에 오르기 전부터 적지 않은 승려들과 교류를 하였고, 일설에 의하면 옹정제의 일생에서 세 명의 스님과 매우 중요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옹정제에게 불교의 가르침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이들을 궁중에 머물게 해서 수시로 그들을 친견했다. 장로 문각선사(文覺禪師)는 사적으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를 국사로 봉해 정치적 고문으로 중용해서 삼엄한 자금성 내에 거주토록 하면서 수시로 정사를 담론하곤 했다. 옹정 11년 문각대사가 70세의 고령으로 옹정제의 명을 받아 강남으로 참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그 지방의 관리들에게 모두 엎드려서 정례하도록 지시를 했으며, 강남의 총독에게 각별하게 보살피도록 명하면서 제자의 예를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문각대사의 특수한 신분과 지위 및 그 중요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외에도 정사에 참여했던 대각사(大覺寺) 주지 성음(性音)과 초성화상(超盛和)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옹정제로부터 특별한 신임과 중임을 받았다. 특히 성음 스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대우를 하면서 그의 견해 및 감오(感悟)의 경지를 좋아하였고, 둘이서 담론을 할 때, 신하들이 알현을 청해도 자리를 피하게 하지 않고 함께 했다고 한다. 반면에 옹정제보다 나이가 어렸던 초성 스님을 대하는 태도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역도역우(亦徒亦友)의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초성 스님의 강설을 들을 때에는 매번 취해서 빠져들었다고 하며 유일한 불학지기(佛學知己)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세 스님 모두 정치와 연루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특히 문각선사와 초성 스님은 여류양안(呂留良案)에 연루되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성음도 이들보다는 먼저 죽었지만, 일찍이 구용탈적(九龍奪嫡)건에 연루되어서 편안한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옹정제는 호법 황제이기도 하다. 특히 승사(僧舍)를 아주 잘 보호했던 황제로서, 그가 재위 시에 서부 청해성 서영부(西寧府)에 대규모의 사원인 단갈이사(丹망爾寺)가 있었는데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옹정 원년에 청해성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옹정제는 감숙성 일대의 총독인 연갱요(年羹堯)에게 토벌토록 명령했다. 연갱요는 그곳을 평정하고 나서 단갈이사의 라마들을 쫓아내고 승방 1천5백 칸을 점유해 관병들을 주둔케 하였다. 그러자 그 사원의 승려들이 강력한 항의와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옹정제는 사찰에서 모든 청나라 관병들을 물러가게 하였으며, 이 사건을 일으킨 주범들 모두에게 죄를 물어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했다.

옹정 말년에는 대량의 고찰 및 명찰을 중수하거나 보수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강남 형계(荊溪, 현재의 宜興縣)의 숭은사(崇恩寺)는 본래 옥림 통수(玉林 通琇)가 주석하면서 전법을 펼쳤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을 중수하도록 명령하였으며, 공금을 지출해서 절강성의 보타산(普陀山) 관음성지인 보제사(普濟寺)와 법우사(法雨寺) 등을 수리하게 하면서 친히 감독관을 보내서 불사를 돕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렇게 황제가 친히 나서서 불사를 관장했던 적은 중국 역사에서 그리 흔치 않은 광경이다.

옹정제는 선종의 내부에 대해서도 간섭을 했다. 중국 선종은 명ㆍ청대에 이르러서 임제종과 조동종만이 번성했는데, 이 중에서도 임제종이 비교적 우세하였다. 임제종에는 당시 유명한 선사로서 소암 덕보(笑岩 德寶) 밀운 원오(密雲 圓悟) 한월 법장(漢月 法藏) 등이 있다. 이때에 옹정제는 선승들의 부패가 엄중하다는 핑계로 원오와 법장의 논쟁을 간섭했는데, 원오를 지지하는 바람에 법장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옹정제가 지은 〈어제간마변이록(禦制揀魔辨異錄)〉은 비록 원오와 법장간의 논쟁에 대한 논술이지만, 사실은 법장파를 비판한 책이다.

밀운 원오(密雲 圓悟)는 속성은 장(蔣)이고 강소성 의흥(宜興) 사람이며 30세에 처를 버리고 출가했다. 40세에 한유 정전(幻有 正傳)을 친견하고 46세에 법을 전수받고, 50세가 지나서 개당설법을 했다. 그 후 그는 26년 동안 전법을 하였고, 세수 77세에 입적했다. 〈밀운선사어록(密雲禪師語錄)〉, 〈천동어록(天童語錄)〉이 세간에 유전되었다. 한월 법장의 속성은 소(蘇)이고, 강소성 무석(無錫) 사람이다. 37세에 구족계를 받았고, 40세에 오도했다고 하며 54세에 개당설법을 했다고 전해진다. 한월 법장이 비록 밀운 원오를 참배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관점에 차이로 도리어 밀운 원오를 공격하면서 장기간 논쟁을 이어갔다. 마침내 옹정제의 간섭으로 법장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행이 그가 지은 〈삼봉화상어록(三峰和語錄)〉, 오종원(五宗原) 그의 제자인 홍인(弘忍)이 지은 〈오종구(五宗救)〉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서 당시의 두 파간의 긴박했던 상황을 엿볼 수가 있다.

사실 이 두 파간 분쟁의 쟁점이 된 원인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법에 대한 관념과 관점 및 방법론의 차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옹정제는 〈간마변이록〉에서 원오대사는 스스로 조계정맥을 얻었다고 하면서 “그 언구기용(言句機用)은 오직 향상을 제시해서 직지인심을 가리키며, 이에 서쪽에서 온 뜻과 계합한다”고 했고, 법장에 대해서는 “온전히 그 본성에 미해서, 무지한 망설을 하면서, 미친 언어로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고 하면서 “진실로 외마(外魔)의 지견”이라고 혹평을 했고, 심지어는 법장의 제자 홍인이 지은 〈오종구(五宗救)〉에 대해서는 “마설로 무궁한 마업을 지어서 썩지 않기를 바란다. 천하 후세에 눈을 갖춘 자가 적어서, 그 해악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설(邪說)을 조장하고 유행시킨다고 강력한 불만을 표출했다. 심지어는 법장과 그의 문도를 ‘마인부자(魔忍父子)’라고 하면서, 법장을 마장(魔藏), 홍인을 마인(魔忍)이라고 칭했다. 옹정제는 유지를 내려서 법장 문하의 저작을 모두 훼손시켜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

옹정제가 비록 불교를 신봉하면서 호불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종교조차 정치에 이용한 태생적인 정치가이자 황제였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인 치적도 많지만, 반면에 정치적으로 많은 살생을 범한 군주이기도 하다 즉 살공신(殺功臣) 주이기(誅異己) 등 정치사에서 지울 수 없는 피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이러한 행위를 할 때 불교도의 시각으로 사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는 분명 군주의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아주 단호하게 망설임 없이 정적을 없애는 과감한 행위를 저질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