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에 입은 옷만 보는 눈먼 안목

48. 알음알이

2020-12-18     지안

“산승이 오늘 법을 쓰는 것은 진실하고 바르게 이루어 놓기도 하고 부수어 버리기도 하며 마음대로 신통 변화를 부려 모든 경계에 들어가되 어디서나 아무 일이 없어서 산승의 경계를 바꿀 수가 없느니라. 다만 와서 구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곧 그를 알아보나 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 내가 몇 가지 옷을 입으면 학인은 옷을 보고 알음알이를 내어 한 결 같이 나의 말에 말려들고 마느니라. 괴롭도다. 눈멀어 안목 없는 머리 깎은 사람들이 내가 입은 옷을 붙잡고 푸르다, 노랗다, 붉다, 희다, 색깔만 인식하느니라. 내가 옷을 벗어버리고 청정한 법신의 경계로 들어가면 학인은 한 번 보고 기뻐하다가 내가 또 옷을 벗어버리면 학인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망연히 미친 듯이 달아나며 내가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느니라. 내가 곧 그에게 말하되 ‘내가 옷을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하는 사람인 줄 아는가?’라고 하면 그때야 홀연히 고개를 돌려 나를 알아보느니라.”

법을 쓰는 것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진여의 작용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진여가 바로 각(覺)의 본체인 마음이다. ‘이루어 놓기도 하고 부수어 버리기도 한다’는 말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활자재(死活自在)한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왕이 칼을 잡은 것과 같다(如王秉劍)’고 비유한 말이 어록에도 가끔 나온다.

깨달은 이는 깨닫지 못한 사람의 얕은 경계를 알아보지만 깨닫지 못한 이는 깨달은 이의 깊은 경계를 알아볼 수 없다. 그래서 “도가 같아야 바야흐로 알아본다(同道方知)”고 하였다. 〈법성게〉에도 “증득한 지혜라야 알 바요 나머지 경계가 아니다(證智所知非餘境)”고 하였다.

수행의 내공(內工)이란 깊이 감춰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겉모습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도(道)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련된 기교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비록 일대시교(一代時敎)인 8만4천 법문을 설했다 하지만 실법(實法)이 아닌 방편설이라 한다. 그래서 교(敎)의 말을 곡담(曲談)이라 하고 선(禪)의 말을 직설(直說)이라 말하기도 했다.

규봉(圭峰)은 부처님의 말씀은 활등과 같고 조사(祖師)의 말씀은 활줄과 같다고 비유해 말하였다. 선수행에 있어서는 말에 놀아나는 것을 금기시킨다. 이론적 논리를 대입하려는 것을 사구(死句), 곧 죽은 말이라 하고 실참(實參)을 하는 공안을 두고 활구(活句), 곧 살아 있는 말이라 하였다. 깨달은 경지를 활구소식(活句消息)이라 한다.

눈먼 안목 없는 사람들이 겉에 입은 옷의 색깔만 보고 알음알이를 낸다고 개탄을 한 임제는 누가 옷을 입고 누가 옷을 벗느냐 묻고, 입고 벗는 주인을 바로 알라 다그친다. 선의 법문은 모두 ’주인공‘ 찾는 법문이다.

사람의 몸을 옷이라고 말한 선사(禪師)도 있었다. 나고 죽는 생사를 옷을 입고 벗는 것이라고 설한 임종게를 남긴 고려 때 자진 원오(慈眞 圓悟, 1215~1286)의 송(頌)이 있다.

“내일 갈 테니 많은 말 않겠노라. 태어나는 것은 옷을 입는 것이오, 죽는 것은 옷을 벗는 것이다.(明將行矣 不欲多語 生也如着裙 死也如脫俊)”

또 앉은 채로 돌아가는 것을 좌탈(坐脫)이라고 했는데 이 말에도 ‘벗는다’는 뜻이 있다. 누워서 죽건, 앉아서 죽건, 서서 죽건, 죽는데 무슨 자세가 중요하냐고 말할 수 있지만, 생사를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안으로 수행한 힘이 없으면 좌탈입망(坐脫立亡)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대등은봉(五臺鄧隱峰)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입적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생사의 근본 문제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단도직입적으로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선은 말의 논리나 철학적 사유를 떠나 있으면서도 교리나 철학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그러면서도 가장 평범한 말로 옷 입고 밥 먹는(著衣喫飯) 도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문관(無門關)〉 제 7칙에 조주세발(趙州洗鉢) 이야기가 있다. 총림에 처음 온 스님이 조주에게 인사를 드리고 잘 지도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조주가 물었다

“아침에 죽 먹었는가?” “예” “그러면 발우를 씻게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