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의 깨침 5단계
94. 깨침의 길 9
“집착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는데도, 왜 자꾸만 집착하게 될까요?”
집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절실하게 느낀 사람들이 간혹 던지는 질문이다. 그들은 ‘집착하지 말아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을 잡아보지만, 그 다짐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곤 한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동안 집착하면서 살아왔던 에너지가 무의식에 가득 차있는데, 한두 번 마음먹는다고 사라지겠는가. 마치 수십 년 피운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기 힘든 이치와 같다. 집착이 쌓이는 데 들인 시간만큼, 비우는 데도 그 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기독교를 서구 사회에 전파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마음으로 원하는 선(善)을 행하지 않으며, 내가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 악(惡)을 행하도다.”라는 솔직한 고백을 한다. 마음으로 선을 행하고 싶은데 정작 행동은 반대로 흐르는 현상, 즉 몸과 마음, 행동과 생각 사이의 넓은 간극은 우리 모두 실존적으로 느끼는 문제다. 불교에서 행하는 명상과 기도, 주문, 참회 등의 수행은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실천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수행이 깊어졌을 때 비로소 마음으로 선을 원하면 행동도 선한 방향으로 흐르고, 집착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면 실제 행동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몸과 마음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단계적인 수행을 강조한다. 유식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오직(唯) 마음(識)의 작용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마음은 오랫동안 무의식에 쌓인 업의 에너지다. 그 에너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온갖 편견과 선입견이 작동을 하는 것이다. 유식의 수행은 이러한 편견(識)을 지혜(智)로 바꾸는 실천이다.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하는데, 편견과 미망에서 벗어나 지혜의 눈, 깨침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까지 점차적인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유식에서는 미망에서 벗어나 깨침에 이르는 과정을 다섯 단계(五位)로 설명한다. 첫째로 자량위(資糧位)는 깨침이라는 먼 길을 가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는 단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信) 이해하는(解) 일이다. 붓다가 강조한 것처럼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과 지혜를 통해 이것이 옳은 길인지, 나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질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가행위(加行位)는 믿고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수행에 힘을 쓰는 단계다. 이런 정진을 통해 세 번째 단계인 통달위(通達位), 즉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번뇌가 소멸되고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뀌는 경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모든 수행을 마치는 것일까? 유식에서는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쌓인 습기(習氣)가 저 깊은 무의식에 남아서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세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한 수행이 계속 되어야 한다. 네 번째인 수습위(修習位)가 그것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정진을 이어가면 완전한 지혜를 얻는 다섯 번째 단계인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게 된다. 몸과 마음, 앎과 삶이 완전히 하나 되는 경지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점차적이고 단계적인 수행을 강조한다. 그런데 자량위에서 통달위까지 1아승지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수없이 윤회를 반복하면서 무한한 시간 동안 수행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아는 대로 살게 되는 구경위(究竟位)까지는 또 다시 2아승지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총 3아승지겁의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현생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을 사실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겁(劫)이라는 무한한 시간은 한 생각 스쳐 지나는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법성게(法性偈)〉에서도 “무량한 겁이 곧 한 생각(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관건은 얼마나 간절한가에 달려있다.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하면 3아승지겁의 시간이 한 순간으로 압축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겁을 내고 물러날 필요는 없다. 꿈은 이루어진다. 〈끝〉